식량과 음식: 풍요 속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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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과 음식: 풍요 속의 불안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1.12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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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37강>_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의 「식량과 음식 문화」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강연 시리즈 ‘삶의 지혜’가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37강 이덕환 교수(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의 「식량과 음식 문화」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이덕환 교수는 식량을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과 함께 미량 영양소인 비타민과 미네랄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정의하며 인류가 바로 그 “식량을 스스로 생산해서 자립함으로써 화려한 문명 생활”을 누리게 됐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제는 “식량의 생산도 중요하지만, 식량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소비하는 노력도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음식의 생리적 기능과 사회문화적 가치라는 문제를 다룬 후, 현대 사회에서 “식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가 길어지면서 식품에 대한 불안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안을 부추기는 식품 정보에 쉬이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건강한 상식이 건강한 식습관을 만들어준다”는 기초 인식 아래 과학적 태도가 필수불가결함을 말한다.

▲ 지난달 14일, 이덕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3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달 14일, 이덕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3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먹거리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누구나 넉넉해진 식생활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식탁을 마주하는 소비자들이 오히려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식생활이 뿌리부터 무너져버렸고, 정부는 소비자의 불안을 해소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언론과 인터넷이 퍼나르는 식품 괴담이 소비자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잘못된 식습관에 의한 영양 불균형으로 비만, 당뇨, 심혈관계 질환을 걱정하는 소비자도 늘어나고 있다.

식량의 생산

식량은 우리가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과 함께 미량 영양소인 비타민과 미네랄을 제공하는 자원이다. 모든 식량은 살아 있는 동물, 식물, 미생물에서 생산하고, 그 유래에 따라 곡물, 축산물, 수산물 등으로 분류한다. 다양한 식량을 충분하게 소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양 결핍이나 불균형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식량의 생산도 중요하지만, 식량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소비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자연이 우리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먹거리를 구하는 일은 쉬울 수가 없는 일이다. 동물과 식물도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한다. ‘붉은 여왕 가설’로도 알려진 지속소멸 법칙(law of constant extinction)에 따르면 그렇다. 결국 인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생산해서 자립함으로써 화려한 문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의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1960년대의 녹색혁명이 완성되면서 전 세계의 식량 생산량은 정체 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0년부터 세계적으로 1인당 소비할 수 있는 식량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 농경지의 면적을 확대하고, 단위 면적당 식량 생산량을 향상시켜야 하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인류가 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농작물이나 가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경작지의 확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육지 면적 1억 5000만제곱킬로미터의 약 10%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경작이 가능한 토지는 이미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식량 증산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단위 면적당 식량 생산량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박테리아 파지(phase)가 가지고 있는 제한효소를 활용해서 원하는 유전자 부위를 삽입시키는 유전자 재조합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GMO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대의 화학 농법의 부작용을 줄이고, 사회적 수용성을 강화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온실가스 과다 배출에 의한 기후 변화, 물 부족, 환경 오염, 생물 다양성의 손실 등에 의해 식량 안보와 지속가능한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 농약의 무분별한 오용과 남용에 의한 피해도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의 사정도 심각하다. FAO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우리의 비료 사용량은 헥타르당 268킬로그램으로 미국의 2배에 가까운 수준이고, 농약 사용량도 헥타르당 11.8킬로그램으로 미국의 4.5배 수준이다. 비료와 농약의 남용과 오용의 피해는 매우 심각하다. 그렇다고 화학비료의 사용을 무작정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 화학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서는 자연 생태계에서의 탄소, 질소, 인의 순환을 유지시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음식의 생리적 기능과 사회문화적 가치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음식은 건강한 삶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고유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환경적 가치도 담고 있다. 지역에 따라 독특하게 발달한 음식 문화는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음식의 일차적 기능은 우리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다. 음식은 우리의 생리작용에 꼭 필요한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탄소 화합물로 구성된다. 비타민과 철, 황, 소듐(나트륨) 등 미량 영양소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음식을 통해서 섭취한 화합물은 소화 과정을 거치면서 화학적 대사 과정을 거쳐 몸 밖으로 배설된다.

음식도 의약품과 비슷한 생리적 효능이 나타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식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 없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저독성(低毒性)의 물질이고, 의약품은 특별한 생리 활성을 가지고 있어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최소한의 양만을 섭취해야 하는 고독성(高毒性)의 물질이다. ‘독(毒)도 잘 쓰면 약(藥)이 된다’는 옛말은 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식품과 의약품의 구분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음식에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환경ㆍ사회ㆍ역사ㆍ종교적 특성도 진하게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음식에 사용하는 식품, 식품을 생산하는 방법,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식을 먹는 방법이 모두 그렇다. 음식에 대한 전통이 다양한 신화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음식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식품은 자연 상태에서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고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박테리아나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의 증식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식품을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저장하는 기술이 음식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식품을 건조시키거나, 훈제하거나, 소금ㆍ설탕ㆍ식초에 절이거나, 발효균을 이용한 발효 기술을 비롯 다양한 식품 저장 기술이 지역이나 시대에 따른 음식 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조리 기술은 식품의 소화를 쉽게 만들어주고, 독성 물질을 제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조리법은 경험적으로 우연히 알아낸 것이다.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이 많이 이용된다. 그러나 우리 몸속의 면역 체계를 믿고 독성 물질이 포함된 자연산 식품을 그냥 먹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균형적인 식생활이 음식에 포함된 독성 물질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다. 다양한 종류의 독소를 조금씩 섭취하는 것이 톨(Toll)형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방법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식품 저장, 운반, 가공 기술을 이용한 여러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스로 식품을 생산할 수 없는 도시 지역의 주민들이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식품의 장거리 운반이 가능해지면서 이국적인 음식 문화의 확산도 가속화되고 있다. 음식 문화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낯선 이국의 음식에 대한 거부감도 크게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맛에는 매우 중요한 생리적 의미가 담겨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좋은 맛’과 싫어하는 ‘나쁜 맛’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삭힌 홍어나 반(半)건조한 과메기의 맛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청어를 발효시킨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의 강한 맛과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맛에 대한 취향은 양육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소비자의 불안을 부추기는 식품 정보

현대 사회에서 식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가 길어지면서 식품에 대한 불안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복잡한 유통 과정을 거치는 식품과 음식점 음식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대량으로 생산해서 유통되는 가공식품의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나쁘다. 생산자의 입장에서도 불특정 다수가 소비하는 식품의 생산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기 어려운 형편이다.

식탁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냉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공연히 음식을 탓할 이유가 없다. 세상에 근본적으로 나쁜 음식은 없다. 쌀밥과 설탕, 소금과 첨가물, 육류와 가공식품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값싸고 열량이 높은 패스트푸드를 나쁘다고 할 이유가 없다. ‘서구식 식생활’이 건강에 나쁘다는 보건학자들의 주장은 무책임한 억지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식습관이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맛에 빠져들어 ‘과식과 편식을 멀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잊어버린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할 일이다.

결론

우리가 과식과 편식의 잘못된 식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신선하고 깨끗한 식품만을 선택해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조리한 슬로푸드가 좋다는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누구나 풍요로운 식탁을 즐길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웃도 적지 않다. 패스트푸드나 품질이 나쁜 식품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도 생각보다 훨씬 많다. 우리의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라고 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생산량도 적고, 품질도 좋지 않은 유기농을 고집해야 할 이유도 없다.

식품 소비에 대한 윤리 회복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먹거리는 모두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들의 희생으로 생산된 것이다. 그런 먹거리를 단순히 품질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마구 폐기해버리는 것이야 말로 반(反)생명적이고 반(反)환경적인 일이다. 자연산 식품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경계해야 한다. 식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보존 기간을 늘이는 식품 가공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윤리적 책임이고 의무다. 우리 몸이 아직도 구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도 몹시 어설픈 것이다.

음식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다. 음식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맹목적으로 맛에만 집착하는 고약한 식습관은 하루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음식에 대한 지나친 불신을 떨쳐버릴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만병통치나 불로장생의 암브로시아나 ‘착한 식당’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금물이다. 동시에 독성 물질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도 건강한 식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건강한 상식이 건강한 식습관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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