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역사학 1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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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역사학 1교시
  • 오항녕 전주대·사학
  • 승인 2024.04.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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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의 말_ 『역사학 1교시, 사실과 해석』 (오항녕 지음, 푸른역사, 188쪽, 2024.03)

 

자존심 상한 일 

① 사실 :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② 전기 : 물질 안에 있는 전자 또는 공간에 있는 자유 전자나 이온들의 움직임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의 한 형태. 음전기와 양전기 두 가지가 있는데, 같은 종류의 전기는 밀어 내고 다른 종류의 전기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위는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사실(事實)과 전기(電氣)에 대한 정의이다. 역사학은 사실을 다룬다. 전기는 전기과나 전자공학과 등에서 다룰 것이다. 느닷없이 둘을 예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을 보자. 사는 일 사(事) 자(字)이고, 실(實)은 실제라는 말이니까, 국어대사전에서 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사실’이란 한자 단어를 한글로 그대로 푼 것이다.(실제(實際)도 한자어인 건 넘어간다.) 동어반복이다. 그러니까 사실을 정의(定義)한 것이 아니다. 정의란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설명하여 밝혀주는 것을 의미한다. ①의 정의에는 설명이 없다. 역사 사(史) 자를 쓴 사실(史實)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②는 어떤가? 물질-자유 전자, 이온-에너지-양전기, 음전기-밀고 당기는 힘 등 전기의 구성, 작용, 성질을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여기서 기분이 팍 상했다. 역사학의 핵심개념은 동어반복의 있으나 마나 한 정의가, 물리학이나 화학, 전기학 등의 핵심개념일 전기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학적(學的) 정의가 사전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싫지만 인정해야 할 것, 바로 학문의 수준이다. 개념과 그에 대한 정의는 학문의 수준을 보여준다. 역사학은 학문의 ABC가 안 된 것이다.


해석이 균형감각?

역사 공부를 하면서 늘 사실과 해석이라는 용어를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한데 정작 나 자신부터 사실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위의 국어사전처럼 동어반복으로 이해했다. 사실의 학문인 역사학에서 사실이 애매한데 해석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그럴 리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 역사 교과서 검인정 제도가 재도입되고, 근현대사 과목이 분리되면서 나온 게 금성사 교과서다. 내가 수구 보수는 분명 아닌데, 나같이 온건한 사람이 보더라도 지나치게 좌편향이었다. 그런데 그걸 비판하는 쪽에서 너무 나갔다. 그렇게 나온 게 교학사 교과서 아닌가. 여기나 저기나 균형감각을 잃은 건 같다. 이런 서술에서 무슨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겠나, 이런 위기의식에서 책을 펴냈다.

이는 어떤 역사학자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몇 년 전 역사 교과서 논쟁을 우파와 좌파의 관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균형감각을 강조한다. 전형적인 기계적 균형이다. 식민지 강점기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려는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이 이승만과 한민당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다. 뉴라이트 ‘금성사 교과서’ 류는 이를 서술하지 않거나 부정한다. 과연 이 사이에서 균형은 어디에 존재할까? 100만 원 뇌물수수와 청렴 사이의 균형은? 50만 원 뇌물수수?

역사를 이런 기계적 균형감각으로 접근하면 역사 안에 존재하는 정의와 불의뿐 아니라, 슬픔과 기쁨, 안타까움, 비극 등을 가늠할 잣대를 잃게 된다. 거기서 얻는 교훈이 무엇일까? 훈계가 남겠지. 역사와 도덕의 혼동이다. 역사와 도덕을 혼동할 경우 전지적(全知的) 시점에 서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역사학자가 졸지에 “좌우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운운하는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

다음과 같이 구성해보았다. 1장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뿐 아니라, 학자들의 경우에도 사실에 대한 정의를 소홀히 한 결과 겪는 혼동이 어떠한지 살펴볼 것이다. 이는 우선 사실에 대한 경시로 나타난다. 이거, 역사탐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중 하나가 대충 알고 얘기하는 풍조의 만연이다.

2장에서는 사실 자체의 성격을 묻는다. 국어대사전을 보여준 지금도 사실이 그냥 사실이지 무슨 성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곤란하다. 역사학의 대상은 사실이다. 거듭 강조한다. 모든 학문은 대상이 있게 마련이고 입문 시간에 그 대상부터 정의한다. 물리학에서는 힘과 에너지를, 언어학에서는 언어를 정의한다. 사실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통해 사실은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 또는 그 결과로, 구조+의지+우연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고 정의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3장에서는 사실과 해석이 어떻게 만나는지 다루겠다. 이 대목은 필자가 나름 이론화해서 제시하는 것인데,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조금 어려울 뿐이다. 요약하자면, 해석은 사실과 내적·외적으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역사 서술을 만들어낸다. 내적 연관은 사실의 성격 자체에서 비롯된 해석의 내재성을 말한다. 외적 연관은 기록자, 연구자의 관심, 취향, 가치관, 지적 능력 등으로 인해 생기게 마련인 다양한 조망을 말한다.

4장에서는 사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실수와 오류를 알아보겠다. 기억의 오류와 왜곡부터 읽기, 쓰기의 실수까지 사람의 역사 활동에는 흠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인다면 분명 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훈련을 통해 나아지지 못한다면 그건 학문이 아니다. 사실과 해석에 대한 연습도 예외가 아니다.

이 4장은 별도의 저서를 준비 중이다. 의외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쉽게 함정이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러 차례 실수를 범하였다. 이 책에서는 오독부터 흔한 왜곡까지 몇몇 사례만 들어보았다.

마지막 5장은 4장의 연장이다. 사실의 이해를 사료 비판의 차원에서 간략히 살피면서 역사 교과서의 사례를 통해 사실에서 사료로, 또 사료를 기초로 형성되는‘ 역사 인식’‘, 역사성’이라는 주제를 검토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데 정작 역사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걸 느끼고 준비해보았다. 언젠가 칼럼에 다름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역사 공부에 대한 필자의 소견으로 책 소개 인사를 마치고자 한다.

흔히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보기 나름이라고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공부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史實은 늘 구멍이 뚫려 있고, 사람의 눈은 다르다는 그 지점에서 말입니다.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상황을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 나가는 지루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숭고한 여정, 그것이 역사 공부입니다. 그래서 역사 공부는 연대의 삶, 공감의 삶, 배려의 삶을 확장시키는 토대라고 굳게 믿습니다.

 

오항녕 전주대·사학

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중국 연변대학교·독일 튀빙엔 대학교 초빙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동아시아 기록위원회(EASTICA) 이사,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실록이란 무엇인가』, 『후대가 판단케하라』, 『호모 히스토리쿠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밀양 인디언』,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역서로 『대학연의보 [4]: 권20~권27』, 『사통(史通)』, 『대학연의(大學衍義)』, 『국역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문곡집(文谷集)』, 『존재집(存齋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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