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진 14세기 인류 최후의 정복자 아미르 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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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14세기 인류 최후의 정복자 아미르 티무르
  • 성동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 승인 2024.04.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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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아미르 티무르: 닫힌 중아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키다』 (성동기 지음, 우물이있는집, 288쪽, 2024.03)

 

유라시아대륙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평선, 높이를 상상할 수 없는 산맥들, 그리고 깊이를 측정하기 어려운 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약한 바람을 순식간에 대지를 휘몰아치는 태풍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태풍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도 한다. 이러한 법칙은 대륙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 존재조차 찾을 수 없었던 집단이 어느 순간 대륙의 지배자가 되기도 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제국이 한 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대륙에서 영원한 권력을 가지고 신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대륙이라는 바둑판과 체스판에는 셀 수 없는 무한의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은 역사 속에서 미약한 인간이 자신 위에 역사의 흔적을 새길 수 있도록 허락해왔다.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역사에서 단지 세 사람만이 대륙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스스로 대륙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륙을 설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경영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대륙은 한 인간의 지배를 허락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이 이러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인물이자 대륙이 허락한 인류 최후의 정복자는 누구일까? 바로 14세기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출생한 아미르 티무르였다.

아미르 티무르는 1336년에 유라시아대륙의 실크로드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 부근의 작은 마을인 케쉬(Kesh, 현재 우즈베키스탄 샤흐리사브스(Shakhrisabz)에서 몰락한 역적 가문인 몽골계 바를라스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이슬람 수피즘(Sufism)에 심취하여서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야생마처럼 혼자 자랐지만 중앙아시아 초원의 점성술사들이 800년마다 한 번씩 빛나는 ‘행운의 별’이라고 일컫는 ‘샤흐브키란’(Sahibkiran)의 기운을 받아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맹하여 청년기에 이미 중앙아시아 몽골동포들의 차세대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앙아시아 몽골동포의 내전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며 급기야 세이스탄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오른쪽 팔다리에 부상을 입고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만 했다. 그의 서양식 이름인 ‘티멀레인’(Tamerlane)은 절름발이 티무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였다.

아미르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를 통일했을 때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분할 통치하였던 아랍 지역의 일칸국은 이미 사라졌고, 러시아 지역의 킵차크칸국과 중국의 원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유라시아대륙 전체가 새로운 질서를 찾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실크로드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미르 티무르가 세운 국가는 실크로드의 교차로에 있었다. 따라서 실크로드가 살아나야만 했다. 그는 실크로드의 부활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떠났을 때 마케도니아인이 그를 따랐고 몽골인은 언제나 칭기즈칸과 함께 했다. 그러나 아미르 티무르는 자신을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없었다. 그는 120여 민족이 공존하는 중앙아시아의 다민족ㆍ다문화 사회를 소통과 화합으로 이끌면서 수니와 시아에 염증을 느껴 발생한 이슬람 수피즘을 장려해서 국가적인 종교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천재적인 군사전략과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1,000일이 넘는 유라시아 원정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실크로드는 다시 살아났다. 아미르 티무르는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14세기 당대에 최고의 도시로 만들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경제, 무역,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미르 티무르는 유럽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세워진 신흥강국 오스만투르크를 1402년 중세 최대의 전투인 ‘앙카라 전투’에서 초토화시켜 유럽의 구세주가 되었으며, 완벽한 실크로드 부활을 달성하였다. 그는 1404년 중국의 명(明)을 정벌하러 떠났다가 오트라르에서 병으로 위대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아미르 티무르는 분명히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등과 같이 한 시대를 혹은 한 세기를 풍미한 역사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역시 위의 인물들처럼 침략, 파괴, 학살, 지배 등을 통해 정복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동시대와 후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필자는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천재적인 군사전략가라면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처럼 평가가 있었을 것이고, 한 번도 국제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칭기즈칸처럼 분석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면 칭기즈칸과 히틀러처럼 연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아미르 티무르는 중세와 근세를 넘어가는 시점에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14세기의 유라시아 대륙을 설계하고 통치하였던 아미르 티무르는 중세에 번영한 아시아의 마지막 선과 근세를 만든 유럽의 출발선에 서 있었던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한 세기에 걸쳐 동시대를 지배했던 그를 배제하고 유럽 근세의 출발과 발전을 논하기는 힘들다고 판단된다.

아미르 티무르는 위기에 빠진 유럽을 구원한 구세주였다. 그는 유럽을 침략하려는 오스만투르크를 상대해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하였다. 서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하지 않을까 하는 유럽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서쪽으로 공격을 하지 않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는 재기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만약 아미르 티무르가 그 시점에 오스만투르크를 굴복시키지 않았다면 유럽은 어쩌면 역사 속의 왕국들로 남아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몽골제국에 의해서 소통되었던 실크로드의 아미르 티무르에 의한 재건은 유럽이 다시 아시아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의 발화점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세력을 회복한 오스만투르크가 실크로드를 차단하면서 유럽인들이 바다로 아시아를 가고자 하였다. 이것이 신대륙 개척의 출발이다.

서구학계는 유럽의 르네상스와 근세로의 발전은 자체적인 역량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라고 대부분 주장한다. 실제로 문헌을 살펴보면 유럽의 중세는 오늘로써 끝나고 내일부터 바로 유럽의 근세가 시작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세상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쳐 중세 기독교의 암흑기를 경험한 유럽사회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근세라는 거대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이러한 논의가 지금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미르 티무르는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세계의 역사학계가 아미르 티무르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를 단순히 침략자, 학살자, 정복자로 덮어버린다면 세계사는 큰 구멍을 가질 것이며 유럽의 중세와 근세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성동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우즈베키스탄 국립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베크어로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다). 저서로 『아미르 티무르: 닫힌 중앙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키다』, 『우즈베키스탄의 사회와 문화의 이해』,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21세기 유라시아 도전과 국제관계』(공저), 『우즈베키스탄 불멸의 고려인 영웅 김병화』, 『억지부리는 남자: 호자 나스레딘』(편역), 『우즈베크어-한국어사전』(공저), 『중앙아시아학 입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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