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속에 잠재된 다양한 문화 . . . 우리말은 누가 뭐래도 혼성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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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속에 잠재된 다양한 문화 . . . 우리말은 누가 뭐래도 혼성언어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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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푸는 역사 기행(2)_ 이상한 강릉사투리

강릉 사투리 어휘 중에는 다른 곳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참으로 기이한 것이 ‘소갈비’다. 광우병 파동을 이기고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LA 갈비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 말은 ‘솔잎’을 가리킨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여 실소가 절로 나는 솔잎 대 소갈비의 초반 對應과 종반 相通.

소갈비는 ‘솔’과 ‘갈피’의 합성어인 ‘솔갈피’로부터 시작된다. ‘갈피’는 책갈피, 길갈피, 꽃갈피, 갈피끈, 갈피표 등에서 보는 바대로 ‘겹치거나 포갠 물건 하나하나의 사이나 틈’을 의미한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전에는 책을 읽던 곳이나 특정한 지점을 표시하기 위해 책갈피에 종이쪽지나 실끈 같은 갈피표를 끼워 넣었다. 책갈피는 본래 ‘책장과 책장의 사이’를 말했으나, 의미가 확장되어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의 낱장 사이에 끼워 두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되었다.

솔갈피가 소갈비로 변신하기까지의 음운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솔나무가 소나무로 변했듯, 솔의 종성음 /ㄹ/이 탈락되고, 갈피의 /ㅍ/가 /ㅂ/로 유성음화되어 마침내 소갈비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솔잎과 소갈비 두 말은 딱히 똑같은 절대 동의어는 아니지만 친연 관계에 있다. 알고 나면 이렇게 우리말의 어휘적 스펙트럼은 화려하다.

가난하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정겨운 단어 누룽지, 눌은밥에 더하여 강릉사람들은 ‘소꼴기’나 ‘소대끼’를 애용한다. 소는 솥에서 /ㅌ/음이 탈락한 것인데, 꼴기와 대끼는 어떤 말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려나 우리말 어휘의 폭넓음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탄력받은 김에 강릉말의 폭넓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본다. 압권 중의 압권으로 뚜껑이 무엇의 뚜껑이냐에 따라 강릉인들은 색다른 명칭을 사용한다. 그래서 병뚜껑은 병 따꼉, 솥뚜껑은 소두벵이, 일반적인 뚜껑은 따까리라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코딱지를 코따까리라고 하는데, 이렇듯 따까리는 ‘어딘가에 예속되거나 부착된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어감이 별로 좋지 않게 사용된다. 주로 군대용어로 쓰이는데, 대대장 따까리, 오장 따까리(선임병 수하인 후임병)에서 보듯,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이 가방모찌에서 보는 일본어에서 들어온 ‘모찌’다. 가방모찌는 ‘상사의 가방을 들고(所持) 수행하는 비서’를 뜻한다. 참고로 일본말 ‘따까리(たかり)’는 ‘남을 협박해 금품을 빼앗는 사람, 즉 등쳐먹는 사람’을 지칭한다.

떡(甁)을 일본말로 모찌(もち, ~모치)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팥 앙꼬(소)가 든 찹쌀떡(앙꼬모찌)과는 달리 일본 모찌는 우리네 인절미처럼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모찌의 본뜻은 ‘所持하다.’ 예전에 일본에서는 神社에 갈 때 간식용으로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찹쌀떡을 가지고 다녔고, 그래서 찹쌀떡을 모찌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홍진희, 『양파와 다마네기』, 창조인, 1999).

이렇듯 우리말 어휘 속에는 다양한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민족이 만주와 한반도에 유입되어 형성된 혼혈 사회에서 개개 민족의 언어적 특성이나 어휘가 뒤섞인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말은 누가 뭐래도 혼성언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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