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가 낳은 자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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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가 낳은 자식일지 모른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1.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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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_ 백제 武王의 비는 善花公主일까? ②


낭만적 관점에서는 사랑에 국경이 없다지만, 현실적으로 사랑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우리의 경우 한때 동성동본 간 결혼이 불가능했고, 외국인과의 결혼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컸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다르더라도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상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딸이 문란하다는 내용의 노래가 곳곳에서 불려지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아버지 진평왕이 딸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다는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바보 온달을 사랑한 평강공주도 있고, 적국의 호동왕자에게 반해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도 있기는 하다. 문제는 그런 사랑의 결말이 대개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을 때 선화공주와 무왕의 로맨스가 완전 허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스님은 어디서 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을까? 가야국 시조 수로왕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 간의 힘겨운 국제결혼 이야기도 재미삼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史實의 취사선택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떤 역사적 기록도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주의적 역사 해석을 초래하기 쉽고 상호 합의된 객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간(間)주관성에 기반을 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의 공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史官은 사료의 선별이라는 고독한 밧줄타기에서 균형성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김부식에게는 선화공주 이야기가 없고 일연선사(속명: 全見明)에게는 있는 까닭이 김부식은 경주 김씨로 유학자이고, 일연스님은 본관이 玉山인 全氏라서는 아닐 것이다. 결국 선화공주의 실재 여부는 삼국유사와 10년 전에 뜻하지 않게 발견된 사리봉안기에서 찾아야 한다.  

▲ 부여 사택지적비
▲ 부여 사택지적비
▲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익산 미륵사지 석탑
▲ 미륵사 석탑 출토 사리호
▲ 미륵사 석탑 출토 사리호

2009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 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 중에 석탑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에 의하면 백제 무왕 부여장(扶餘璋)의 왕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인 사탁(沙乇)왕후이며 그녀가 639년(무왕 40년) 미륵사 창건의 주체다. 이렇게 되면 선화공주를 무왕의 妃로 기록한  『三國遺事』 기사의 숨은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沙乇왕후가 무왕의 비라면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隋書』 百濟條에 “백제에는 ‘국중대성팔족(國中大姓八族)’이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협씨(劦氏)ㆍ해씨(解氏)ㆍ진씨(眞氏)ㆍ국씨(國氏)ㆍ목씨(木氏)ㆍ백씨(苩氏)가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沙(사)씨는 원래 沙咤(사타) 혹은 沙乇(사탁), 沙宅(사택)씨였고, 眞(진)은 眞慕(진모), 木(목)은 木劦(목협)이라는 復姓의 초성만을 적은 單姓 표기다.

현재의 우리에게 낯선 複姓 ‘沙乇’은 중국 측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沙陀’(사타), ‘沙宅’(사택), 혹은 ‘沙咤’(사타) 등으로 표기되는데, 이들은 같은 발음에 대한 이표기다. ‘沙’는 ‘砂’로 표기하기도 한다. 沙陀는 유목집단인 돌궐별부(突厥別部)의 족칭이다. 사타라는 종족명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설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큰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沙陀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견해가 다르다.
 
9세기 말 당나라 조정에서는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최초로 소금 전매를 실시했다. 875년 소금 밀매업자였던 황소가 봉기군 60만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환관의 횡포와 농부들에 대한 수탈이 원인인 민중반란이라고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소금밀매 수익을 빼앗기게 된 데 대한 황소의 저항에서 비롯된 반란이다. 놀란 희종(僖宗)은 四川 成都로 피신하고 제국의 수도 장안과 낙양은 이내 반란군에게 짓밟힌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를 칭하며 大齊를 건국하였다. 이때 이 난국을 타파한 세력이 사타족이다.

오르도스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가 그 무렵 산서 북방 大同으로 거주지를 옮긴 사타족의 우두머리는 용병의 천재 李克用(856~908)이었다. 그는 881년 온몸을 검은색 복장으로 감싼 갈가마귀군(鴉軍: 갈까마귀 아)이라 불리는 정예병을 이끌고 황소군 토벌에 나선다. 883년 28세의 이극용과 그의 부친 주야적심(朱耶赤心) 부자는 황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당 조정에 의해 진왕(晋王)에 봉해진다. 그리고 國姓인 李氏 姓을 하사받는다. 그래서 사타족 주야적심은 李國昌(?~883)이 되었다.

923년 晉王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李存勗)이 오랜 라이벌 後梁을 무너뜨리고 낙양을 수도로 하여 後唐을 건국했다. 후량은 한 때 황소군의 간부로 있다가 후일 황소를 배신하고 나온 朱溫(朱全忠의 본명, 852~912년)이 907년 선양의 형식을 취하고 당의 마지막 황제 哀帝를 폐한 뒤 스스로 칭제하며 세운 왕조다.

936년 북방의 강자로 등극한 거란의 도움을 받은 또 다른 사타족인 석경당(892~942)이 後晉을 세운다. 이 나라를 석경당의 성을 따 石晉이라고도 불렀다. 석경당은 원군에 대한 대가로 거란에 해마다 비단 30만 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국경지역 연(燕)일대의 16州를 넘겨주었다. 燕雲十六州라고 불리는 이 땅의 탈환은 오대 이후 송나라까지 이어지는 오랜 비원이었으나, 송나라 대까지 완전한 탈환에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지만, 8~10세기 당나라 말기 중국 땅에서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야심찬 사타족의 사나이들이 五代 다섯 왕조 후당, 후진, 후량, 후한, 후주 중에서 후당과 후진을 건국하는 대업을 이루고 있었다.

고대사회에는 지배계급만이 성이 있었다. 하나의 정치 체제로서의 흉노는 수많은 씨족과 부족의 연맹체였다. 지도자인 선우가 나오는 집단, 연지를 배출하는 집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선우는 세습적으로 연제씨 집안에서 나오고, 연지는 양이라는 뜻의 호연씨 집안에서 나왔다. 주요 지배계층은 권력의 핵심부가 되었다. 거란도, 선비도, 몽골도, 여진도 그랬다.

백제도 王姓은 부여씨로 시종일관 그 집안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왕비를 내는 집안은 解氏와 眞氏였다. 웅진 천도를 통해 웅진시대를 연 백제 24대 東城王(? ~ 501년, 재위: 479~501년)은 치세 초반까지만 해도 한성에서 내려온 해씨, 진씨의 왕비족과 목협만치(木劦滿致)를 중심으로 하는 木劦氏 같은 남래 세력들의 위세에 밀렸으나, 점차 신진세력인 사씨(沙氏) 즉 사타씨 그리고 연씨(燕氏)와 백씨(苩氏) 등을 등용해 세력기반을 다진다. 좌평제도(佐平制度)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유력한 토착세력에게 좌평이라는 관직을 제수했다. 좌평은 백제 최고의 관직으로 동성왕대 이전까지 좌평직에 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왕족과 해씨 진씨 등 외척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沙氏 즉 沙乇氏는 백제 왕실의 웅진 천도를 계기로 새롭게 중앙귀족으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정치적 입김도 커졌을 것이고 마침내 사탁적덕의 딸이 무왕의 비로 간택되는 막강한 가문으로 성장했다고 보인다.

그럼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는가? 2009년 1월 이전까지 우리는 무왕의 비가 선화공주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무왕의 비가 당시 좌평 벼슬의 막강한 세력인 사탁적덕의 여식이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史實기록이다. 백제 왕실의 인척가문이 된 沙乇氏의 정치, 외교적 행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우리 측에는 沙?과 沙宅으로 기록되고 중국 측에는 沙陀 등으로 기록된 유목집단의 주요 활동무대는 중앙아시아였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언제부터 백제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자 음차어 沙陀의 본이 되었을 sart는 과연 무슨 뜻의 말일까? 이 용어의 기원과 관련하여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상인’ 또는 ‘隊商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범어 sārthavāha(살보(薩寶)로 음역)의 차용과정에서 sart가 파생되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여기에 동조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해당하는 소그디아나, 그리고 서돌궐과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오가며 중간 교역을 담당하던 소그드 상인의 무리 즉 隊商(카라반) 또는 그 우두머리를 소그드어로 s'rtp'w[sartpu]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카라반’이라는 뜻의 梵語 sārtha와 ‘보호자’란 뜻의 고 페르시아어 *pāvā의 이란어와 인도어 섞인 혼성어다. “상인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위구르어 sartpau, 티베트어 sar phag, “속주 장관(satrap)”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어 xšaçapāvā 등도 닮은꼴이다.

또 다른 주장은 몽골어로 sar는 ‘달’을 뜻하고, sart나 sarta는 “달의 종족/달이 그려진 깃발을 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타족은 몽골족 이전에 이미 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어와 연관 짓는 것은 무리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시대 당시 몽골인들은 중앙아시아 특히 화레즘(Khwarezm) 지방 사람들을 Sartuul이라고 불렀다. 현재 화레즘 지방 자브칸(Zavkhan) 주에 Sartuul이라고 불리는 몽골계 상인들의 후손으로 구성된 종족이 살고 있다.

▲ 일자눈썹과 금이빨이 특징인 타직족 여인
▲ 일자눈썹과 금이빨이 특징인 타직족 여인

라시드 앗 딘은 『부족지』에서 sart나 sarta에서 비롯된 Sartaqtai(사르탁인)가 Tajik(타직인)과 동의어라고 했다. 타직인은 현재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의 주요 종족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우즈베키스탄의 古都 사마르칸트와 아프카니스탄에도 많이 살고 있다.

사타씨가 언급된 유물 때문에 선화공주만 애꿎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순혈민족이 아니라 다혈민족임을, 인간사회는 필연적으로 하이브리드 사회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추정컨대 무왕의 비는 사탁왕후이고, 선화공주는 무왕의 여자이기는 했지만, 당시 백제 왕실의 혼인법도상 왕비의 적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의자왕(641~660) 즉위 후의 일을 기록한 『일본서기』의 황극(皇極) 1년 642년 條의 기사다.

"백제 국왕(義慈王, 武王의 아들)의 모후인 ‘國主母’가 죽자 弟王子(왕의 동생) '교기(扶餘翹岐)'를 비롯 동모매(어머니가 같은 여동생) 4명과 내좌평 기미(岐味) 외 고위관리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왜일까? ‘국주모‘가 國母격인 정실왕후 사탁왕후였으나 후사가 없어 다른 왕후 소생인 의자왕이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대좌평 사택지적(砂宅智積)이 654년 碑에 남긴 내용이나 의자왕(657)이 왕족(부여씨)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사탁씨족의 실권을 빼앗은 사실로 미루어 사탁 가문과 의자왕은 정치적 갈등 내지 대립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가 낳은 자식일지 모른다. 그리고 무왕의 공식 왕비 사탁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한 배경에는 무왕과의 사이에 왕세자를 낳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의문을 남기고 진실은 알기 어렵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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