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문의 기틀을 마련한 언어 천재,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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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어문의 기틀을 마련한 언어 천재, 김수경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2.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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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 이타가키 류타 지음 |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552쪽

 

어쩌다 북한 인사들 또는 북한 언론을 접할 때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로동당(노동당), 력사(역사), 리론(이론) 등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민족’의 주요 결정 요소 중 하나가 동일 언어인 만큼 이런 낯섦을 줄여나가는 것은 우리 겨레의 앞날을 위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북한의 언어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언어학자가 김수경이다.

그는 현행 북의 철자법의 기초가 된 《조선어 철자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해방 직후 북에서 최초로 공간된 《조선어 문법》을 비롯하여, 1954년에 간행되어 중국과 일본의 동포들에게까지 널리 교육된 《조선어 문법》을 집필했다. 한마디로 김수경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 무렵까지 북한 언어학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한 언어학자이자 언어정책의 설계자로 그를 빼놓고는 북한의 언어학을 빼놓을 수 없다. 한때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시작되었던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사업이 지지부진한 만큼 더욱 그동안 잊혔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김수경은 10개 국어 이상을 구사한 언어 천재였다. 그는 경성제대 본과에 진학하면서 언어학에 뜻을 두었는데, 저자는 “어학에 능통한 청년에게 여러 언어에 두루 걸쳐 있는 일반언어학의 세계가 출구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세계를 개척하는 것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 보이’가 동시에 ‘소쉬르 보이’로도 될 수 있었던 동인은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김수경은 ‘이론/리론, 논리/론리’ 등 이른바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언어생활에 유익하다는 것을 형태주의 이론으로 명백히 뒷받침했다. ‘스탈린 언어학’의 수용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조사와 용언의 활용어미를 보조적 품사 ‘토’라 규정하여 자주적인 언어학을 시도했다. 여기에 일본어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로 쓰인 외국 문헌을 참조하는 등, 그의 어학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말년의 노작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의 언어는 어휘와 음운 체계에서 약간의 방언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공통되는 하나의 언어였음을 주장하는 등 조선어사 연구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저자 이타가키 류타 교수(일본 도시샤대학, 역사인류학)는 이 책에서 한 지식인의 경험을 통해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로 이어지는 북한의 역사서술을 시도한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미국, 캐나다, 러시아, 중국, 한국, 북한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고 구술조사를 수행한다. 이를 토대로 개인을 가로질러 접속되고 연동되는 복수의 맥락들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김수경 개인의 역사를 북한사, 한반도사, 세계사로 확장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식민지 지배나 냉전이 만들어낸 학문의 경계를 넘어 언어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교차시키고 체제의 억압에 짓눌린 사람들의 행위자성이나 창조성을 드러낸다.

 

저자는 ‘비판적 코리아 연구’를 단순한 학문 연구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기고 있기도 하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저항하여 히노마루·기미가요 법제화나 언론 탄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거나 교토의 조선학교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여 재판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며 식민지 지배책임을 묻는 실천을 하고 있다.

문화인류학자로 ‘비판적 코리아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을 ‘학문사’라 규정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로서는 남북 분단을 몸으로 겪어낸 김수경과 그의 가족의 신산한 삶에 눈길이 갈 터이다. 한국전쟁에 종군한 김수경과 그를 찾아 월남한 가족의 엇갈림, 캐나다로 이민 간 딸과의 베이징에서의 해후, 띄엄띄엄 편지 왕래 끝에 아내 이남재와의 만남 그리고 2000년 임종하기까지 한 지식인의 삶을 통해 20세기 한반도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조선어학의 길에 들어섰고, 미군정하에서 지하 활동에 들어갔을 때는 ‘가시밭길’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때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가시밭길’을 걷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당신과 아이들에게 ‘가시밭길’을 걷게 했다니……” 맏딸을 먼저 보낸 아내의 회한이 담긴 시를 읽고 김수경이 편지에 적은 감회로 6장 재회와 복권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은 학문사를 지향하는 평전이지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그 어떤 소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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