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다’…민간인 학살의 은폐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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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다’…민간인 학살의 은폐된 진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2.25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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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헌터: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388쪽

 

2023년 3월, 충남 아산 성재산에서 정체불명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양손이 ‘삐삐선(군용 전화선)’으로 묶인 채 일렬로 엎어져 쓰러진 유골들. 그 앞으로 역시 양손이 결박된 한 유골이 쪼그려 앉아 있다, 마치 잠에 든 듯한 모양새로. 그에게 ‘A4-5’라는 식별번호가 겨우 붙여진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이 책은 뼈의 증언을 좇는 인류학자 박선주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이 70여 년 세월을 초월해 만나는 스펙터클한 ‘유골 추적기’이자 생생한 역사 논픽션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가폭력 피해자의 상흔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 책은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독특한 ‘교차식 구성’을 따르며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참상과 땅속에 묻힌 진실을 추적한다. 먼저, 하나의 축은 민간인 학살사건 이야기로, 유골·생존 피해자·유가족·유품·관련 주변인·가해자 등 여러 화자의 시점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학살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현해낸다. 다른 하나는 인골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으로 한평생 유해가 남긴 진실을 좇아온 실존인물 ‘뼈 인류학자’ 선주의 이야기이다.

영문도 모른 채 죽임당한 이들과 집념의 인류학자,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해 결국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만나게 된다. 발문을 집필한 역사사회학자 강성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는 “일종의 ‘다크 투어’ 방식으로 죽음의 이유와 특징을 탐문”한다는 점은 이 책의 큰 특징이다.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 있었냐면, (중략) 63만 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던 셈이다.” 이 책은 쪼그려 앉은 채로 발굴된 유골, A4-5의 건조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혹시 함께 나온 유품을 살피면 이 유골들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삐삐선과 탄피 사이로 ‘중’ 자가 새겨진 단추들이 여럿 나온다. 중학생도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왜 산속에 줄줄이 끌려와 죽었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글 〈사람을 할 결심〉은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이 꽃피는 계절이었다. 싱싱한 초록의 나뭇잎들이 연도에 도열해 축하 박수를 쳐주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앞둔 청년의 열망이 꿈틀거리다 못해 요동친다. 그의 부푼 마음처럼, 문장 곳곳이 생명력과 사랑으로 가득 차오른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인류학자 선주의 이야기다.

이처럼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한 두 이야기는 언뜻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두 서사는 오로지 ‘뼈의 증언’을 따라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의 궤를 그리며 아이러니하게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한국 현대사 속 끔찍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구체적으로, 충남 아산 성재산 기슭에서 발굴된 유해 A4-5의 독백으로 시작한 아산의 이야기는,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계된 다양한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진행된다. 1부에서, A4-5 그리고 그와 함께 발굴된 ‘A5-4’. 이보다 앞선 1995년에 인근에서 비슷한 정체불명의 유골을 발견했던 건축 현장 담당자 인욱, 성재산으로부터 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지역 새지기의 유골 ‘새지기2-1’과 ‘새지기2-2’는 공통적으로 발굴 당시의 현장감과 유골 상태로부터 알 수 있는 학살사건의 진상들을 들려준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국가가 암묵적으로 승인한 사형(私刑)이었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매우 독특하다. 민간인 학살은 일차적으로 군·경찰의 지시와 집행으로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작전과 공식 명령계통으로 하달되어 조직적으로 ‘빨갱이’를 색출하고 부역자를 처형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사적 복수와 욕망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국가는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군·경은 방임하거나 외려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국면과 1951년 1·4 후퇴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들의 희생자로 77명의 최종 신원을 확인했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연령 미상 32명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 연령은 10세 미만으로, 총 14명이었다. 최소 800여 명이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A4-5가 65만 시간의 기다림 끝에 땅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한국전쟁은 때로 오늘날 우리와 관련 없는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한국전쟁기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피해 규모는 여전히 집계 중에 있다. 은폐된 폭력의 역사를 마주하고 집단적 차원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복원할 때, 그렇게 조각나고 파묻힌 것들을 다시 이어붙일 때, 한국 사회는 침통함을 넘어 비로소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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