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다시 공론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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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다시 공론장을 말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2.2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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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 |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 한승완 옮김 | 세창출판사 | 128쪽

 

이 책, 2022년판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은 60여 년이 지난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래로 변화한 공론장의 모습과, 이어진 토론에 대하여 하버마스가 내놓은 대답이다. 비록 128쪽밖에 안 되는 작은 책임에도,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9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회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디지털 미디어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디지털화된 의사소통이 어떻게 공론장을 파편화하는지 논한다. 그리고 이렇게 디지털화한 공론장이 공론장의 원칙을 잃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반쪽짜리 공론장(Halboffentlichkeit)’으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디지털화는 세계화를 촉진하면서 경계를 허무는 듯하지만,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 차폐벽을 세우면서 사람들을 동질적인 사람들 속에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동질적인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의견 교환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에 대한 포용성을 잃고, 사실 확인을 통해 걸러지지 않은 무분별한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공론장의 위기는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디지털 공론장이라는 차폐된 반향실에서 메아리쳐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만을 들으며 소수의 여론을 과대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그들의 존재를 망각해 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이라는 생각에 빠지고, 결국에는 공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의견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쪽짜리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의견 교환이라기보다는 의견 확인에 가깝다. 상대의 의견이 나와 같은지 확인해 보고, 나와 같다면 동조하고 나와 다르다면 배척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소셜 미디어 내부에 머물지 않고, 사회로 표출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때 이러한 소셜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은 우리에게 기대를 품게 하기도 했다. ‘아랍의 봄’ 당시 시위는 인터넷을 통해 확대되었고, 민주주의는 인터넷을 통해서 드디어 제약 없는 의견 교환과 평등한 의견 교환을 달성한 듯했다. 그러나 우리가 맞아야 했던 것은 트럼프였다.

민주주의는 반쪽짜리 공론장에서 확산하는 대중영합주의로 인해 다시금 위기를 맞았다. 물론 소셜 미디어가 가져온 공론장의 성격 변화만으로 현재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와 포퓰리즘의 발흥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글로벌화, 디지털 기술과 AI 등 첨단기술의 발전, 계층 또는 계급 이론, 국제 이동과 이주의 가속화, 정체성 정치 등에 대한 논의 등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금 공론장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는 하버마스의 시도는 정당한 지배질서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해 줄 것이라 기대된다.

그런데 우리가 하버마스와 같은 석학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에 대한 진단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하버마스는 반쪽짜리 공론장으로 전락한 디지털 공론장과 그로 인해 찾아온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의 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토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제기된 이의와 토의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면서, 토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시 설명해 주고 있다. 하버마스는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데서 오며, 토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호 존중이라는 토의적 이상이 사람들 사이에서 믿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한에서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 것이다. 우리는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존중보다는 무시가, 사랑보다는 혐오가 만연한 시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도태되었다고 느끼고, 결국에는 포기하고는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 버린 이상을 되새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자유로운 법적 동료들의 자결적 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을 때만 우리 사회를 신뢰할 수 있고, 우리가 “서로에게 부여한 권리의 저자”라는 사실을 되새김으로써 사회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바라듯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차폐된 반향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단지 이 문을 열고, 이 장벽을 허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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