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현대까지, 중독과 씨름해 온 인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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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현대까지, 중독과 씨름해 온 인류의 역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2.20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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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의 역사: 우리는 왜 빠져들고, 어떻게 회복해 왔을까 | 칼 에릭 피셔 지음 |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512쪽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정신 의학과 교수이자 중독 전문 의사, 칼 에릭 피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은 바로 [회복 중인 중독자]라는 점이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이자 약물 중독자였던 저자는 환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힘겨운 회복의 과정을 몸소 겪었다. 생명 윤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중독과 회복의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인류가 여러 세기 동안 제대로 다루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중독]이라는 현상의 역사를 다채롭게 추적한다. 의학, 과학, 문학, 예술, 종교, 철학, 사회학, 공공 정책까지 아우르는 이 책은, 우리가 중독의 역사를 파고들어 그 성공과 실패를 되짚어 보아야만, 중독의 위험성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술, 담배, 커피 같은 일상 기호품, 한번 시작하면 손 놓기 힘든 게임과 도박, 정신을 어지럽히는 각종 약물, 그리고 현대 생활의 필수품 SNS와 스마트폰까지……. 중독은 다양한 형태로 인류와 함께하며 쾌락 또는 고통을 안겨 왔다. 미국 사회는 50만 명을 죽음으로 이끈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 문제에 이어, 최근엔 좀비 마약이라 불리는 [펜타닐] 문제로 혼란에 빠졌고, 한국도 청소년층을 비롯해 전 세대로 퍼지는 신종 약물 문제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 가운데, 중독의 본질은 대체 무엇인지, 그 적절한 대처법은 무엇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저자는 중독의 본질과 적절한 대처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중독과 씨름해 온 인류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 간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 인도, 그리고 유럽의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중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추적하고, 이후 물질 사용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대응책이 나왔는지 알아본다. 특히 중독을 질병으로 보는 관념, 각종 중독에 대응하기 위한 운동 등이 주로 근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기에, 근현대의 이야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책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며 중독에 대한 대응이 대략 네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정리한다. 처벌과 강제로써 억제해야 한다는 금지론적 접근법, 강박 충동에 의한 것이므로 의학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치료적 접근법, 두뇌의 기능 이상에서 비롯하므로 생물학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환원론적 접근법, 그리고 치료보다는 연대를 통한 정신력의 고양으로써 극복해야 한다는 서로 돕기 접근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들에는 각기 문제와 한계가 있었다. 금지론적 접근법과 환원론적 접근법은 인종주의와 계급적 편견의 양상을 띠어 열등한 하층 계급, 부도덕한 자들이라는 낙인을 찍거나 특정 인종과 젠더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측면이 있다. 치료적 접근법은 약물 치료를 확산시켜 제약 회사만 배 불리는 결과를 낳고, 좋은 치료약과 중독을 일으키는 나쁜 약이라는 이분법이 생겨 오히려 중독 문제를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런 혼란과 조정을 거쳐, 근래에는 중독을 확연한 질병이라기보다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모든 정신 질환은 일종의 스펙트럼 위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고, 중독 역시 그렇다는 얘기다. 저자는 중독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물질 사용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실효적으로 도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중독과의 현명한 공존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해로운 물질은 적절히 규제하고,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는 단속하고 처벌해야 하지만, 중독에 대한 정책이 금지 일변도라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물리적, 개인적, 사회적 자원이 두루 어우러지는 회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이 책은 정리한다. 아울러 중독 문제를 둘러싼 여러 차별과 불평등의 요소를 줄여 나감으로써, 회복이 개인의 여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경험으로 쌓여 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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