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공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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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공간, 화장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2.2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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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 전쟁: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에서 펼쳐진 특권, 계급, 젠더, 불평등의 정치 | 알렉산더 K. 데이비스 지음 | 조고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388쪽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젠더, 섹슈얼리티,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저자 알렉산더 K. 데이비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200년 가까운 미국 공중화장실의 역사를 살펴보고 화장실을 둘러싼 조직 내 의사 결정권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현대적인 담론을 포착하여 화장실을 만드는 이들이 공중화장실을 경유해 젠더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19세기 후반 배관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내 수세식 화장실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배관 및 건축 기술자들은 위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며 화장실의 시장 가치와 그들의 직업적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위생은 미국이 추앙하는 가치로 자리매김했고 도시 빈민층에게도 최소한의 위생을 보장하기 위해 최초의 공중화장실이 등장했다.

20세기 초 의학 및 과학 담론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성차에 관한 연구가 권위를 얻었다. 이에 노동운동의 성과가 더해지며, 여성 노동자를 위한 화장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남성 노동자를 위해 이미 설치된 화장실과 동등한 화장실을 여성 노동자에게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는 성별분리 화장실을 의무화하는 법적 규제로 발전한다.

20세기 후반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별 및 화장실 접근성에 대한 공적 토론에 진입했고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었다. 1991년에는 성별이 구분되지 않고 기저귀 교환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휠체어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널찍한 ‘가족용 화장실’이 등장하여 열띤 호응과 함께 확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공중을 포용하려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실패해왔다. 도시 빈민층을 위해 지어진 최초의 공중화장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은 그 화장실을 기피하게 되었으며 지역 자영업자들은 공중화장실의 존재를 항의하기에 이른다. 결국 대다수의 공중화장실은 호텔, 기차역, 백화점과 같은 중산층 이상을 위한 시설에 위치하게 되고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계급과 도시 빈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함께 여성 노동자를 위한 화장실이 지어지기 시작했으나 당시 동등한 화장실을 추구하는 조직적, 법적 논리는 궁극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본질적 차이가 있으며 여성의 몸을 나약하고 모성적인 몸으로, 무엇보다 성적 약탈의 위험을 겪는 몸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고 성별분리 화장실 법제화는 이러한 문화적 메시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중반부터 꾸준히 늘어난 직장 화장실 관련 성차별 소송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권리는 시스젠더 여성의 권리보다 보호받을 가치가 덜한 것으로 여겨졌고 법원은 직장 내 성차별을 주장하는 원고의 감정을 중요한 근거로 삼아 판결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원고들은 승소하기 위해 ‘합리적인’ 사람이 ‘반대’ 성별에게 신체가 노출되었을 때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에 대한 법원의 기대에 부합하는 방식, 즉 규범적인 성역할 기대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술하게 되었다.

동등한 화장실을 얻어내려던 여성들의 투쟁은 시간이 지나자 건물에 성중립 화장실을 추가할 공간이 없는 이유가 되고 말았고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 역시 부유한 지역에서 훨씬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가난한 지역은 공간의 물리적 한계와 개조 비용의 제약으로 과거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더 교육받고 더 부유한 지역일수록 더 많은 젠더 포용적 공간을 갖게 되면서 성중립 화장실은 문화적 권력과 특권 체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계급 질서를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면 평등을 위한 노력은 결국 불평등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가? 《화장실 전쟁》의 후반부에서는 보다 평등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조직 내부에서 노력해온 현장의 행위자들과 만나 가장 현대적인 담론을 분석한다.

조직 내부의 행위자들은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고 다른 동료들을 설득하여 성평등한 화장실을 설치하기 위해 기존의 법률적 근거를 창의적으로 활용했다. 때로는 젠더 포용적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행위자가 속한 조직의 평판에 도움이 될 거라 설득하기도 하고 비슷한 조직에서 먼저 젠더 포용적 공간을 성취한 다른 이들에게 설득 전략을 배우기도 했다. 

물론 보다 성평등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들은 계급 질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고 특권계급에 속한 행위자들은 그렇지 않은 행위자들보다 수월하게 바라던 바를 이루었지만, 젠더화된 조직과 불평등한 사회에서 행위자들은 특권과 제약을 넘나들며 기존의 관행에 도전했다. 저자는 “젠더의 문화적 의미와 사회적 결과가 결코 확정되거나 종결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그 의미와 결과는 개인과 조직 모두에 의해 끊임없이 협상되며, 공중화장실은 오랫동안 그 협상이 투과되는” 프리즘이라고 말한다. 단단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화장실도, 그보다 더 공고한 젠더 질서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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