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를 2차 창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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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를 2차 창작하기
  • 한송희 세종대·문화산업경영
  • 승인 2024.02.1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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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아즈마 히로키』 (한송희 지음, 컴북스캠퍼스, 148쪽, 2024.01)

 

올해 1월 출간한 <아즈마 히로키>는 1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명의 사상가의 사유 지도를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한 사람의 방대하고도 험난한 지적 여정을 얇고 콤팩트한 사이즈로 압축하는 일은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나를 고민에 빠트린 것은 아즈마의 독특한 지위였다. 국내에서 아즈마는 꽤 마니아층이 두터운 ‘서브컬처(subculture) 비평가’로 통한다. 그러니 <아즈마 히로키>라는 제목 아래서 그를 소개하는 작업이란 사실상 아즈마의 ‘서브컬처론’을 맥락화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에 대한 탁월한 주해로 학문의 길로 들어서며 서구 중심적인 사상계에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의 뒤를 이어 또 다른 고유명사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 그가 왜 갑작스레 서브컬처에 골몰하게 됐는지, 또 느닷없이 후쿠시마 원전 관광지화 계획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구글(Google)’, ‘X(구 Twitter)’ 등 온라인 환경을 통한 ‘디지털 민주주의’의 실현에 대한 급진적인 사유를 개진했는지 등을 설명함으로써 몇 년 단위로 급격하게 달라진 그의 산발적인 관심사를 하나의 실로 잘 꿰매어 보여주는 일이 길라잡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실을 택할 것인가’였다. 마냥 흐물거리기만 한다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들을 단단하게 동여매 주지 못할 테고, 그렇다고 뻣뻣하기만 한 실이라면 한껏 당겨지다 결국 끊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즈음 눈에 들어온 것이 사사키 아타루(佐佐木中, 1973~)의 <이 치열한 무력을>이라는 책이었다. 해당 저술에는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아즈마를 뒤이어 일본 철학계의 ‘혜성’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젊은 지식인이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아즈마 역시 여러 곳에서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강구해 왔던 까닭이다.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의 연쇄 속에서 철학의 본질을 묻는 ‘본디’라는 부사어는 ‘우리 시대의’라는 시대적 조건으로 대체됨으로써 과녁을 다음과 같이 재조정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아즈마를 느슨하지만 튼튼하게 엮어낼 수 있는 최적의 실이라는 생각하에서, 나는 현대 사상과 서브컬처, 정보사회론 등을 가로지르며 동시대 철학의 외연을 확장해 온 아즈마를 소개하기 위한 10개의 키워드 - 동물(화), 2층 구조, 오타쿠, 데이터베이스 소비, 우편과 오배, 관광, 다크 투어리즘, 관광객(a.k.a 우편적 다중), 검색어, 일반의지 2.0 등 - 를 선별했고, 이 개별과 총체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아즈마 특유의 도발적이고도 대담한 사유가 무엇에 관한 것이든지 간에 (심지어는 라이트 노벨이나 미소녀 게임 등 서브컬처에 관한 비평마저도) 시대와 세대 변화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소위 ‘인문학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학문과 사상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문자 이론에 기댄 무비판적인 사고와 관성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적(문학적) 상상’을 펼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때 문화적 상상은 대체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류의 발상을 뜻하는 것이기에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주목받은 정동(affection)과 신체(body)에 관한 논의, SF라는 장르적 형식 안에서 뻗어져 나온 여러 창의적인 서사(narrative) 등과 공명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그러한 흐름 안에서 읽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소한 바람이다.

한편 나는 아무리 기본적인 뼈대나 내용을 요약·정리하는 식의 글이라도 엄연히 ‘새로운 글’이라면 원본과는 다른 무언가를 독자에게 줄 수 있어야 하며,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지면에서는 미처 책에서 다루지 못한 한두 가지의 논의를 ‘저자’라는 특권에 기대어 추가로 덧대 보려 한다. 이는 아즈마의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까지 펼쳐질 수 있는지를 마음껏 상상해 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문 ‘해가 지지 않는 세계와 해가 뜨지 않는 세계’에서도 분명하게 짚어 뒀지만 아즈마의 작업(물)을 읽어 나갈 때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바로 ‘2차 창작’이다. 아즈마는 2차 창작을 ‘일본 오타쿠 문화’의 핵심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2차 창작이라는 행위는 학문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기술매체의 비약적인 발전, 그에 따른 문화 수용에 대한 관심 증대 등을 맥락적인 배경으로 삼는다. 간단히 말해 일본의 서브컬처라는 지정학적·위상학적 조건만으로는 2차 창작에 관한 논의를 입체화·다면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2차 창작 개념을 편협하게 이해할 경우, 아즈마가 이전 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재독’하는 또 다른 종류의 2차 창작 역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차라리 ‘원작’ 또는 ‘원저자’라고 하는 절대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에 주목하여, 2차 창작을 ‘전유(appropriation)’와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문화정치의 유구한 역사 속에 위치시켜보면 어떨까.

‘재/전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는다면 아즈마의 포스트모던론은 일부 마니아층만 즐기는 하위문화만이 아니라 조금 더 범박한 차원에서 대중문화에까지 적용 가능하다. 웹툰을 드라마화하는 과정에서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택해 시청자들의 뭇매를 맞았던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디즈니 오리지널 프린세스 중 하나인 ‘에리얼’을 흑인으로 캐스팅해 온갖 비난을 받은 <인어공주>, 최근 ‘Love Wins’라는 성소수자의 구호를 앨범 제목으로 택해 논란에 휩싸이고는 결국 변경된 제목으로 음원을 발매한 아이유의 <Love Wins All> 등이 아즈마를 프리즘으로 삼는다면, 다시 말해 해석의 궤도 이탈과 문화의 탈맥락적 수용, 그로 인해 생성된 새로운 의미와 기존 의미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합 등을 핵심 쟁점으로 삼는다면, 논의는 작금의 경향과 전혀 다른 궤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즈마의 사정거리는 ‘전유(appropriation)’로 특징지어지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에 관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세서(Thomas Elsaesser, 1943~2019)의 짧은 에세이(“Ethics of Appropriation Found Footage”)를 경유함으로써 한 뼘 더 넓혀질 수 있다. ‘파운드 푸티지’란 대개 버려진 영상 자료를 발굴하고 재활용함으로써 이미지를 기존 맥락에서 분리·탈구시키고 재배열하는 작업을 통칭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지와 시공간, 의미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새로운 역할과 가치가 창출되기에 종종 전복적인 문화 실천으로 여겨지곤 한다. 문제는 이 예술의 실천이 ‘기존의 것을 차용한다’는 점에 있다. 엘세서가 위 글에서 지적하려던 바 역시 ‘파운드 푸티지’가 윤리의 문제를 함축한다는 점이었다 - 실제 엘세서는 글의 한 꼭지 제목을 ‘사랑과 절도(Love and Theft)’로 달았다. 각기 다른 기원을 가진 이질적이고 파편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이미지로 재구축됨으로써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내는지가 파운드 푸티지의 미학성을 판단하는 준거가 된다는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파운드 푸티지가 뒤샹에 연원을 둔 ‘파운드 아트(found art)’의 계보를 잇는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이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원작/자의 의도를 배신하고 맥락을 이탈하여 모든 경계를 교란하는 이미지, 그리고 그 뒤로 광활하게 펼쳐진 정치학과 미학과 윤리학의 경계 지대. 그것이 오랜 시간 우리가 반복적으로 목도해온 문화적 풍경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2차 창작은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지털 아카이빙에 기초한 포스트 시네마(Post-Cinema)로의 전환, 리믹스(Remix) 문화의 보편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소수자의 문화정치, 밈(meme)의 무한 증식, 웹툰/웹소설의 영상화, 팬덤 문화의 분화 등 소수자-하위-대중-고급문화의 이질적인 영토를 가로지를 때마다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옅어지지 않는 한 아즈마의 쓸모는 유효하다. 이번에 출간된 나의 책 역시 독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2차 창작되었으면 좋겠다.

 

한송희 세종대·문화산업경영

문화연구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세종대학교 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에 재직 중이다. 미학과 정치학과 윤리학의 접경지대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다수의 연구를 수행해 왔고, 최근에는 환영처럼 출몰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더듬어 보기 위해 글로써 서툰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게 앎을 삶으로 전환하는 길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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