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의 한국 공연과 숭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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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의 한국 공연과 숭고의 가치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4.02.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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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지금은 트렌드가 바뀌었지만, 창작 뮤지컬에서 ‘한국적인 것’을 전방위적으로 고민하던 시절 업계의 이상향은 대부분 〈레미제라블〉(원작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 대본 알랭 부블리, 작곡 클로드 미셸 숀버그, 가사 하버트 크레스머, 제작 카메론 매킨토시, 1985년 런던 초연)에 있었다.¹⁾ 체감상 2010년대 중반까지 대극장 창작 뮤지컬은 전통과 역사를 소재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곤 했는데 이 방식이 제작 여건을 그나마 조성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레미제라블〉은 그 가치를 진중한 역사 뮤지컬로 실현시켜줄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였다. 실제로 〈명성황후〉(1995)가 기획될 때 클로드 미셸 숀버그가 섭외되었으나 제작비 문제로 무산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왼쪽부터) Stars, I Dreamed a Dream_Cho Jung Eun, Bring Him Home(민우혁) / 사진 제공: (주)레미제라블코리아

〈레미제라블〉의 한국 공연사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한국 무대에서 꽤 이른 시기부터 공연되었다. 영국인 패트릭 터커가 연출하고 현대극장이 제작했던 1988년 공연부터 1993년 문석봉 연출의 극단 광장 공연과 이상춘 연출의 롯데월드예술극장 공연, 그리고 1997년 문석봉 연출 버전으로 여러 극장을 옮겨 다니며 이어졌던 공연까지 모두 ‘번역 뮤지컬’로 무대에 올라갔다.²⁾ 물론 당시 프로덕션들이 저작권을 섬세하게 해결하고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넘버의 수도 자의적으로 재편하여 각 프로덕션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작권 의식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그 사이에서도 ‘공식’과 ‘비공식’에 대한 주장이 존재했다. 흥미롭게도 1993년 같은 시기에 공연되었던 두 〈레미제라블〉 공연은 매킨토시사(社) 측과의 협의 유무로 경쟁했다. 하지만 당시 저작권 협의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레미제라블〉의 첫 합법적 공연은 1996년 매킨토시의 첫 아시아 투어팀 공연으로 성사되었다. 당시 CMI는 싱가폴, 홍콩, 한국으로 이어졌던 투어팀 공연을 약 36억 원에 수입했다. 아역들은 오디션을 통해 한국 아동들로 채웠고 성인 배역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앤드, 그리고 호주와 캐나다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맡았다. 이후 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이었던 2002년에 다시 CMI에 의해 브로드웨이 투어팀이 내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라이선스 공연은 오랫동안 성사되지 못했다. 2007년에 라이선스 공연이 추진되어 오디션까지 진행되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위) The Sewers, (아래) Empty Chairs at Empty Tables / 사진 제공: ㈜레미제라블코리아

첫 라이선스 공연은 ㈜레미제라블코리아와 용인문화재단이 함께 제작했던 2012년~2013년 공연이었다. 2012년 11월 용인을 시작으로 대구와 부산을 거쳐 2013년 4월 서울 블루스퀘어 공연으로 이어졌던 장기 공연이었다.³⁾ 당시 공연은 아역을 제외하고, 한국 시장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전 배역 원캐스트로 진행되었다. 이 외에 무대 디자인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원래 〈레미제라블〉은 회전무대와 대형 바리케이드로 기억될 만큼 무대 디자인이 시그니처와 같았다. 그러나 트레버 넌과 존 케어드가 연출했던 영국 바비칸센터 초연 무대 디자인은 〈레미제라블〉 25주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매킨토시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는 동시대 관객을 위해 공연을 리뉴얼하기로 결정하고 무대 디자인과 오케스트레이션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에 따라 영국 초연 때부터 이어졌던 회전무대가 사라지고 무대는 흑백의 3D 그림이 서사의 흐름과 정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 그림들은 약 4천 점 정도의 작품을 남긴 화가이기도 했던 원작자 빅토르 위고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흑백의 명암 대비를 강렬하게 구사하여 매우 낭만주의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던 위고의 그림은 무대에 활용되면서 인물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이렇게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제임스 파우웰과 로렌스 코너가 연출한 25주년 리뉴얼 무대로 시작되어, 초기 회전무대 시절 〈레미제라블〉은 과거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2015년 10월~2016년 3월까지 대구와 서울에서 공연되었던 라이선스 재연은 25주년 무대에 일본 가부키 무대의 하나미치(花道) 개념을 덧붙여 일반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확장시키는 또 다른 시도를 보여주었다. 하나미치란 무대부터 객석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 길을 지칭하는 것으로, 가부키 배우들의 등퇴장로로 활용되기도 하고 배우들이 가장 중요한 대사를 전하거나 유명한 장면을 연출할 때 이용되기도 한다. 재연 〈레미제라블〉 무대는 이 개념을 적용하여 다운스테이지 상하수 끝 객석을 감싸는 구조로 확장되었으며 또한 무대 윗부분까지 무대 디자인을 연결하여 관객이 극적 공간을 단절 없는 하나의 전체로 인지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초연과의 또 다른 차이점은 장발장, 자베르, 판틴이 더블로, 아역인 가브로쉬, 리틀 코제트, 리틀 에포닌은 각각 트리플로 캐스팅되는 현실적인 고려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번 2024년 〈레미제라블〉 라이선스 삼연은 ‘한국 라이선스 10주년 기념 공연’으로서 2023년 10월 부산을 시작으로 현재 서울 공연이 진행 중이며 향후 대구로 이어질 예정이다. 트리플로 캐스팅된 아역을 제외하고 모든 캐스팅이 더블로 확장 운영됨으로써 더 탄력적으로 기획되었다. 무대는 재연 당시의 디자인이 거의 그대로 활용되고 있다.   

                        (위) One Day More, (아래) The Final Battle / 사진 제공: ㈜레미제라블코리아

리얼리즘적 비전과 숭고함의 가치

이러한 〈레미제라블〉 한국 공연사는 한 가지 질문을 일으킨다. 런던 초연 기준으로 그리 멀지 않았던 이른 시기부터 〈레미제라블〉이 수차례 공연되고, 합법적인 라이선스 공연에 대한 요청이 오랫동안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작품의 명성에 대한 호기심과 별개로, 한국에서 〈레미제라블〉은 ‘연극에 상응하는 뮤지컬’로서 예술성이 충만한 작품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예술성은 ‘ABC의 벗’들의 혁명이 한국의 현대사를 구체적으로 환기시키는 리얼리즘적 비전이기도 했고, 판틴의 가난과 비천함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들의 위치를 재고하게 만드는 비판적 프리즘이기도 했다. 문화콘텐츠 시대 〈레미제라블〉의 한국 공연사는 저작권 이전 해적판 시대를 공식적인 역사로 인정하지 않지만, 〈레미제라블〉이 한국 공연계에서 수용되던 맥락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예술성의 핵심에는 ‘숭고미’가 있다. 뮤지컬은 원작 소설의 긴 서사를 압축하여 인물 중심으로 연결되는 유기적 구조를 갖고 있다. 1815년에서 1832년 사이의 프랑스 역사를 복잡한 흐름으로 전개하지 않고 인물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스루(Sung-through)로 질문하는 방식이다. 〈레미제라블〉 공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열망, 고통을 동반한 기쁨,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엄함은 인물들의 명확한 아이 엠 송, 즉 자기 서사로부터 촉발된다. 장발장의 회심을 이끄는 미리엘 주교의 무조건적인 사랑, 끝까지 코제트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장발장의 의지, 코제트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판틴의 순수한 비천함, 자신의 신념이 붕괴되자 가차 없이 삶을 끝내는 자베르의 강직함, 중심에서 혁명군을 이끄는 앙졸라의 기개, 마리우스를 대신해 죽는 에포닌의 환희, 그리고 결국 장발장을 이해하는 마리우스의 정신은 공연을 움직이는 축이다. 

(왼쪽) The Runaway Cart_KAI, (오른쪽 위) I Dreamed a Dream_Lin A, (오른쪽 아래) Look Down / 사진 제공; ㈜레미제라블코리아

이번 삼연 〈레미제라블〉에서는 숭고함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특히 임종을 앞둔 장발장에게 건네는 판틴 (영혼)의 위로는 숭고미를 완성시킨다. 라이선스 초연부터 판틴을 연기하고 있는 조정은은 슬픔과 비천함, 순수함과 열정을 녹여 이 마지막 순간을 장엄하게 그린다. 이 순간을 함께 하는 에포닌 (영혼) 역시 비천한 도시 빈민의 딸이지만 스스로에게는 단 한 번도 비천하지 않았던 특유의 당당함으로 최후의 숭고미에 그만의 결을 더한다. 김수하의 해석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도 이러한 예술적 고양감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는 한 〈레미제라블〉이 주는 기쁨 역시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고 동시에 한계를 자각하게 하는 신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1) 〈레미제라블〉의 초연은 사실 알랭 부블리와 클로드 미셸 숀버그가 프랑스의 아레나 공연장 팔레 데 스포흐(Palais des Sports)에서 프랑스어로 공연했던 1980년 버전이다. 이 버전을 카메론 매킨토시가 접하게 되면서 1985년 영국 바비칸센터에서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 영어 버전이 공연되었고, 결국 크게 성공함으로써 이것이 실질적 초연이 되었다.
2) 4월부터 7월까지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교육문화회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을 옮겨 다니며 공연했다.
3) 용인문화재단의 포은아트센터 개관 기념작으로 시작되었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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