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혐오를 극복하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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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혐오를 극복하는 감정
  • 주형일 영남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4.02.1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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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증오와 혐오는 어느덧 지금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다. 젠더, 지역, 세대 간의 사회적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양당 체제의 고착화로 격화된 정치적 대립은 정치인의 신체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공격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나와는 다른 사람에게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조롱과 욕설을 퍼붓고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를 드러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속에서 커가는 사회적 불안과 불만, 여과되지 않은 증오와 혐오의 표현을 빠르고 쉽게 전파하는 디지털미디어의 일상적 사용, 사람들의 불안과 증오심을 자극하고 이용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세력들의 준동 등은 증오와 혐오의 시대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대표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증오와 혐오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것처럼 보이고 결국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파괴할 것이라 여겨진다. 증오와 혐오의 시대가 만드는 테러 앞에서 몸서리치는 사람들은 낭만과 유머, 양보와 타협이 있어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증오와 혐오의 시대가 없었던 적이 없다. 인류 역사를 지배해 온 증오와 혐오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종족을 말살하고 문화를 파괴해 왔다.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시대를 살면서도 인류가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번영까지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는 어떻게 증오와 혐오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직관적으로 증오와 혐오가 어떤 감정인지를 잘 알지만, 증오와 혐오를 명확히 구별하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혐오나 증오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이유가 다양하고 그런 감정이 발현되는 방식이나 상황도 다양하다. 증오와 혐오는 같은 감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확실히 구분될 수 있는 감정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증오와 혐오를 명확히 구분하기보다는 우리의 직관적인 앎에 기초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자. 

증오와 혐오는 기본적으로 나와는 다른 자, 즉 타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타자에 대해 갖게 되는 부정적 감정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혐오와 증오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타자를 만나게 되면 우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두려움이나 호기심을 갖는다. 상황이 유리하다면 호기심을 가질 것이고 상황이 불리하다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즉, 호기심이나 두려움은 타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갖게 되는 감정이다.

반면에, 혐오와 증오는 타자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를 접했을 때 느끼는 혐오의 감정은 동성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배우고 경험한 지식이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만든다는 점에서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생물적이고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감정이다.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사회적, 문화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점에서 혐오와 증오는 엄밀히 말해 이성적 활동의 산물이다. 이성적 활동이란 설명과 분석을 위해 다름을 식별하고 이유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은 없다. 이성애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 호감을 느낀다 해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곧장 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질 수 있다. 그가 가진 동성애에 대한 지식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타자에 대한 지식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이 혐오와 증오를 위한 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느냐 하는 것이다. 

혐오와 증오가 사실상 이성적 활동의 산물이기에 이 부정적 감정을 이성적 논의와 합리적 토론을 통해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성적 활동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버리는 활동이 아니라 지키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활동은 생각이나 의견을 만들거나 이미 가진 생각이나 의견을 정당화하고 정교화하기 위한 활동이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타자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활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뛰어난 학자들 사이에서 지극히 이성적이고 학술적인 토론과 논쟁이 무수히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 자기의 이론을 버리고 타자의 것을 받아들인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혐오와 증오는 대부분 집단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이성적 토론을 통해 개인을 설득하기도 어려운데, 집단을 설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혐오와 증오는 ‘다르니까 죽인다’라는 생각을 만들고 정당화하는 감정이다. 혐오와 증오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성적 활동이 성공을 거둘 경우, 얻을 수 있는 생각은 ‘다르지만 참는다’이다. ‘다르지만 참는다’라는 생각은 참을성이 한계에 달할 때, 언제든지 ‘다르니까 죽인다’로 바뀔 수 있다. ‘다르다’라는 전제가 유지되는 한, 혐오와 증오는 단지 억제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 증오심을 갖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성적 합의를 통해 평화 협정을 맺은 후에도 항상 불안한 이유는 바로 ‘다르다’라는 전제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분석한 콜나이(Kolnai)나 누스바움(Nussbaum) 같은 학자들은 혐오와 증오는 사랑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증오와 혐오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의 개념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다르다’가 아니라 ‘같다’를 전제로 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혐오와 증오의 감정과는 상반된다. 타자를 나와 다른 자가 아니라 같은 자로 받아들일 때 혐오와 증오가 아닌 사랑이 가능해진다. 

혐오와 증오를 극복할 힘을 제공하는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혐오와 증오는 이성의 활동에서 양분을 얻으며 자란다. 이성의 활동은 다름을 식별하고 구분하는 작업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해 혐오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가지려면 이성적 활동을 중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상학적 방법이 유용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배우고 습득한 모든 지식에 괄호를 친 후에 잠시 판단중지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는 이성적 활동으로 만들어진 지식에 기대는 것을 멈추고 우리의 경험과 체험에 집중할 수 있다.

경험과 체험은 나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이다. 경험과 체험이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려면, 타자의 것과 같거나 유사해야만 한다. 나와 타자는 같은 세상을 경험하고 유사한 체험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타자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타자의 경험과 체험을 나의 것과 같거나 유사한 것으로 인정해야만, 비로소 인간의 삶이 가능해진다. 나의 경험과 체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태도이며 나와 타자를 포함하는 우리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증오와 혐오의 시대들을 지나오면서도 조금씩 혐오와 증오를 줄여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경계와 외연을 계속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외연이 확장될수록 타자의 범위는 줄어든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다름을 포용하면서 같음의 외연을 넓혀 온 역사이다. 이 과정에서 ‘다르니까 죽인다’는 ‘다르지만 참는다’를 넘어 ‘같기에 함께 산다’로 전환될 수 있었다. 

여전히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에 사로잡혀 ‘다르니까 죽인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다르지만 참아라’고 설득하는 것은 근본적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혐오와 증오를 생산하는 이성적 활동을 중지하고 인간의 삶 자체로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증오와 혐오의 시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증오와 혐오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감정에 기대어야 할 것이다.

 

주형일 영남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영남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5대학교와 1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디어, 디지털 세상을 잇다』, 『미디어와 성』, 『사진과 죽음』, 『영상커뮤니케이션과 기호학』,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문화연구와 나』, 『영상미디어와 사회』,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미디어학교』, 『이미지가 아직도 이미지로 보이니?』, 『똑똑한 이상한 꿈틀대는 뉴미디어』, 『생존 사회』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문화의 세계화』, 『일상생활의 혁명』, 『중간예술』, 『미학 안의 불편함』,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정치실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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