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가능성과 현실…수수께끼적인 세계와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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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가능성과 현실…수수께끼적인 세계와 알레고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2.1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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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 남승석·문병호 지음 | 갈무리 | 344쪽

 

벤야민의 소망과는 달리 영화의 역사는 대중을 일깨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아도르노가 간파하였던 대로 대중 조작, 대중 기만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상업 영화와 오락 영화가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영화가 갖는 예술적 능력이 무시될 수는 없다.

이 책은 지금까지 영화 해석의 주요 텍스트로 사용되어 온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물론이고 그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 「운명과 성격」에서, 그리고 아도르노의 미학·예술이론, 역사철학, 사회이론에서 주요한 영화미학적 개념들을 도출하여 새롭고 실험적인 영화해석을 시도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세계가 다시 한번 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세계는 벤야민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서술하듯이 세계를 만든 인간이 세계에 의해 고통 받는 세계다. 아도르노가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슬픈 학문”이라는 말로 표현하듯 세계의 진행은 구원·화해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세계사는 부자유한 노동을 강제당하면서 지배 권력에 의해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의 피, 눈물, 고통, 죽음의 역사이다.

이 책이 분석하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 한국), 〈택시운전사〉(2017, 한국), 〈여름궁전〉(2006, 중국),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대만), 〈복수는 나의 것〉(1979, 일본) 등 다섯 편의 영화는 영상매체로서의 영화가 갖는 장점이 최대한 발휘된 작품들이다. 여기에는 다수 사람들의 피, 눈물, 고통, 죽음이 충격적이며 추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영상들로 담겨 있다. 이 영상들은 슬프고 추한 세계를 증언한다. 하지만 이 증언에는 세계가 변혁되기를 바라는 소망들도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개인들의 삶이 폐기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소망,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들의 삶이 파편화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군국주의와 같은 광기와 폭력의 총체적 체계가 세계에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망이다.

책은 영화라는 문화상품이자 예술형태가 처한 현실에 대한 진단으로 시작한다. 저자들은 영화 그리고 영화계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저자들에 따르면 영화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 세계와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설득력이 큰 인식과 비판의 매개 가능성, 계몽능력을 가진 매체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를 포획하고 있는 현실은 영화의 이러한 순기능을 극단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영화는 자본권력이 저지르는 갖은 종류의 폭력에 부역하는 매체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서, 순수 예술작품으로 성공한 영화들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 문병호는 처음 남승석의 공동집필 제안을 받았을 때 20세기에 탄생한 전적으로 새로운 예술 형식인 영화가 할리우드가 상징하는 것처럼 종종 거대 자본이 투입되고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하는 영화산업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문화산업이 창궐하는 데 광범위하고도 구조적으로 연루되어 온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병호는 남승석이 해석의 대상으로 제안한 여러 편의 영화를 보고 난 후 순수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진 세계 인식 능력과 세계 변혁의 잠재력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영화가 갖춘 순수예술로서의 계몽 능력과 교육 기능을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빌려 강조할 필요성을 느껴 이 책의 공동집필에 참여하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독일 바로크 비애극에는 30년 전쟁이 인간에게 강요한 고통이 퇴적되어 있음을 통찰하였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지속된 참혹한 전쟁이었다. 벤야민은 독일 바로크 비애극과 ‘세계가 인간에게 강요한 고통’이 서로 등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고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본질을 관통하는 표현 형식이 알레고리임을 통찰하였다. 문병호 공동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알레고리는 세계의 고통사, 곧 세계가 인간에게 강요한 고통의 역사를 예술작품에 그림과 같은 언어로서, 다시 말해 형상 언어로서 형상화해 놓은, 예술작품에 특유한 언어”라고 말한다. 알레고리는 형상 언어로서의 언어이며, 수수께끼적 형상으로 세계의 고통사에 대해 말해 주는 언어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에서 분석한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알레고리는 세계가 진행된 역사와 등치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 역사를 근원적으로 퇴적시켜 놓은 것이다. 알레고리는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세계를 해명할 수 있게 하며, 세계의 진행에 들어 있는 부정성을 비판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알레고리는 세계의 부정성은 변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에 매개할 수 있는 계몽 능력을 가진다.

벤야민이 역사를 “세계의 고통사”(『독일 비애극의 원천』)로 본다는 통찰은 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 책이 분석한 다섯 편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 한국), 〈택시운전사〉(2017, 한국), 〈여름궁전〉(2006, 중국),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대만), 〈복수는 나의 것〉(1979, 일본)은 모두 동아시아의 작품으로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 폭력, 억압으로 얼룩진 이 지역의 역사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작품들이다. 이 책은 순수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의 힘과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 책에서 분석한 작품들이 알레고리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라고 본다. 수수께끼적 형상화에 성공한 영화들은 세계가 인간에게 강요한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이 물음은 관객들에게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세계 변혁의 당위성 제고에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영화들이 더 많이 생산된다면, 영화는 인류가 현재 처해 있는 갖은 종류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연대 결성 및 실천적 행동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벤야민의 사유를 “의식을 형성하는 비판, 구원하는 비판”이라고 해석하듯이, 순수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비판을 통한 부정적 현실의 극복에 기여하는 순기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저자들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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