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무모, 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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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무모, 아집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4.02.0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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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교육 개혁으로 사회 난제를 해결하겠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한 방송에서 천명한 야망이다. 교육 개혁의 내용은 ‘전공 자율선택제’라는 이름의 ‘대학 무전공 입학’으로, ‘당장 전면 시행은 쉽지 않으니까 25%까지는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유도하겠다’고 한다.

먼저 내가 근무하던 대학의 현실(다른 대학들의 사정도 비슷하다고 나는 알고 있다)을 말하자면, ‘자유전공학부’를 운영할 뿐 아니라 학생이 원하기만 하면 (국가에서 정원을 관리하는 학문분야는 제외하고) 아무 학문분과에서나 제한없이 복수전공, 부전공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전공 자유선택제’로 부를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한지 10년쯤 되었다. 게다가 ‘가상학과’, ‘연계전공’, ‘학생설계전공’ 등의 이름으로 융복합 다전공 제도도 실행하고 있다. 

사회학과의 형편을 보면, 대다수 학생들이 3학년이 되면 복수 전공, 부전공을 이수하기 위해 경영대학 학과들의 강의를 수강하려 옮겨간다. 졸업에 필요한 전공 이수학점을 36학점(12과목)으로 낮춰 놓았기 때문에 2학년쯤까지 강의를 수강하면 졸업에 지장이 없다. 그래서 사회학과의 3학년, 4학년 전공 강의는 수강할 학생이 크게 줄어든다. 강의를 개설했음에도 수강 학생수가 기준에 미달하면 폐강이 되고, 이것은 교수의 ‘교육 실적 평가’에 낙제 등급을 초래하여 성과급을 박탈하는 데 더해 차후에 다른 강의로 책임시수를 충족해야 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교수들은 폐강의 걱정이 없는 1, 2학년의 입문 수준의 전공 강의를 선호하면서 3, 4학년 강의는 기피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학과 3학년·4학년의 전공 강의는 기껏해야 2~3과목만 개설한다. 사회학 ‘심화’ 전공 학생들은 사회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도 수강할 강의가 없다. 

제도적으로 개설 강의 숫자와 수강 학생의 숫자는 학과의 예산과 교수 숫자와 연결된다. 근래 경영대학의 교수 숫자가 늘어난 만큼(건물도 새로 지었다) 인문, 사회대학의 교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제 대학은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모노버시티(Monoversity)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게 되었다. 교육부장관은 그 방송에서 ‘기초학문 교수는 교양 과목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연구에 대한 지원을 할 것이고 쫓겨나거나 하지 않는다’고 아량있게 말했는데, 그 자체로도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돈 대학’의 현실을 눈감은 궤변이다. 

이것을 교육 개혁으로 부르며 어떤 ‘사회 난제를 해결’하려는지를 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장관이 설마 교육 개혁으로 ‘저성장’이나 ‘저출산’ 같은 사회 난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직된 학사구조를 깨 첨단산업 분야에 필요한 융합형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장관의 장담을 보면 ‘사회 난제’라는 낙인은 ‘청년 실업’을 가리키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거나 ‘인문학은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많은 청년이 융합형 인재가 아니어서 취업하지 못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빼고는, 첨단 기술이 무엇보다도 ‘노동절약적’이고 그래서 융합형 인재인가 여부는 청년실업에서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설사 융합형 인재가 되면 취업에 어려움이 없다고 양보하더라도, ‘경직된 학사구조’가 융합형 인재 양성을 가로막는다고 하기에는 대학의 학사구조가 이미 충분히 유연화했을 뿐 아니라 ‘무전공’ 입학생이 융합형 인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사실상의 ‘전공 자유선택제’ 대학은 ‘융합형 인재’가 아니라 ‘취업’ 유망 학문, 즉 자본이 요구하고 시장이 강제하는 학문분야로 학생들을 내몰아 ‘획일형 인재’를 만들고 있다. 교육부장관이 물러설 뜻이 전혀 없다고 강조하는 ‘무전공 입학’은 지난 20여 년간 진행해온 대학의 신자유주의화와 시장화를 제도로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사회과학 ‘전공’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교육 개혁’이라는 호칭이 낯뜨거운 분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것이다

대학의 ‘획일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공’과 ‘무전공’을 가릴 것 없이 대학 공부의 핵심은 기존 전문지식의 협소한 답습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도전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생각의 제안을 훈련하고 습득하는 데 있다. 하지만 ‘성과 지표 관리’에 목을 맨 한국의 대학들이 ‘취업’ 유망 학과들에 몰려든 학생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기회와 훈련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전공과 무전공을 가리지 않고,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학생들조차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교육부장관은 미국의 스탠포드나 엠아이티 대학이 무전공 입학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니 한국의 ‘모든’ 대학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능력의 빈곤을 자랑하고 있다. 국립대학에 전면적인 ‘성과급제’를 강제함으로써 대학을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린 10여 년 전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의 무지와 무모와 아집이 연출하는 후속편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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