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민⸱형사 소송 실무지침서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국내 최초 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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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민⸱형사 소송 실무지침서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국내 최초 완역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2.0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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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신간 『결송유취보 역주』 (전경목·김경숙 외 역) 발간
-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울대학교 연구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7년간의 노력 끝에 완역
- 소송 법규를 종합·정리한 민·형사 소송법서로 조선 후기 법률과 재판 관련 중요 자료
- 친족 간 같은 관청 근무금지, 강간 시 사형, 강간미수는 장형 100대 등 상세한 조문으로 구성

■ 화제의 책_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역주』 (이지석 편저, 전경목·김경숙·한상권·김현영·김영철·박경·양진석·이혜정·한효정·허문행 역주,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384쪽, 2023.12)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경국대전(經國大典)》(세조 대에 편찬을 시작해 1485년 성종 대에 완성⸱반포된 최초의 통일 대법전) 이래 확립된 소송 법규를 종합⸱정리한 조선 후기 민⸱형사 소송법서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를 최초로 완역하고, 그 내용과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풍부한 해제와 해설을 수록한 신간 『결송유취보 역주』(전경목·김경숙 외 역)를 펴냈다.

이 책은 전경목(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경숙(서울대 교수) 등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7년 동안 번역 및 교감, 해제 집필을 진행하고 수정과 첨삭을 거듭한 끝에 펴낸 역주서다. 이 책은 조선시대 법률과 재판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당시 사회적 영역에 법이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송유취보》는 의령현감 이지석(李志奭, 1652∼1707)이 1649년 편찬된《결송유취(決訟類聚)》를 증보해 1707년 개간한 사찬 소송법서다. 

《결송유취보》에는 《결송유취》(1649), 《대명률》(1397), 《수교집록》(1698) 등의 법률서가 대폭 인용됐다. 특히 《대명률》의 형사소송 관련 내용이 대폭 포함되어 《결송유취보》는 조선 후기 유일한 민⸱형사 소송지침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 대법전인《경국대전》(1458) 이후 확립된 소송 법규를 종합⸱정리해 조선 후기 새로운 국법체계를 수용한《속대전》(1746) 이 편찬되기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 이 《결송유취보》라 할 수 있다.

《결송유취보》에는 △친족 간 같은 관사에서 근무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다룬 ‘1.상피(相避)’조목, △말로 다투다가 때린 범죄를 다룬 ‘2.투구(鬪歐)’조목을 시작으로 △남을 욕하거나 헐뜯는 범죄를 다룬 ‘16.매리(罵詈)’조목, △잡다한 부류의 범죄를 다룬 ‘17.잡범(雜犯)’조목을 거쳐, △묘지소송에 관한 ‘42.산송(山訟)’ 조목까지 총 42조목 516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사회인 조선은 형벌과 다툼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신분과 관계없이 억울한 사람이면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 《결송유취보》는 소송 절차법이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수록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의 법률적 요구가 잘 반영된 법률서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 법치주의 실현의 첫 단계, 법전의 편찬

조선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 법전 편찬에 힘썼다. 통일법전 제정과 지속적인 편찬을 통한 법치주의 통치는 조선시대의 법제사적 특징이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은 크게 다섯 가지를 꼽는다. 

첫째, 조선 최초의 공적인 법전이자 조선 창업군주의 법치주의 이념을 담은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태조 6), 둘째, 조선 법률 체계의 기본 뼈대가 되었던 《경국대전》(1485, 성종 16), 셋째, 《경국대전》 편찬 이후 약 25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법전 조항을 수록한 《속대전(續大典)》(1746, 영조 22), 넷째, 《경국대전》, 《속대전》 및 이후 등장한 법령까지 하나로 합한 《대전통편(大典通編)》(1785, 정조 9), 다섯째, 《대전통편》 이후 등장한 수교(受敎: 관서에서 받은 왕의 명령)와 조례(條例: 왕의 명령과 관사의 관례를 모아서 정리한 규정) 등을 덧붙여 정리한 조선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1865, 고종 2)이다. 


□ 재판에 대비한 소송법서, 목민학의 효시 

조선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기본 법전뿐 아니라 실제 법 집행과 관련한 다양한 법제서가 편찬되었는데, 그중 고을 수령이 재판에서 활용한 ‘소송법서’가 있다. 조선시대 판결은 일차적으로 고을 수령이 담당했는데, 재판은 수령으로서 자질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이다. 적법한 판결을 위해서는 수령이 기본 법전을 비롯한 방대한 법령을 일일이 확인하여 해당 사건에 부합하는 조문을 찾아야 하는데, 여러 법전에 산재한 법률 지식을 완벽하게 섭렵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록 과거시험 과목에 《경국대전》 등이 있었지만, 내용이 소략했고 암기식 공부만으로는 실무에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국대전》, 《대전속록》, 《대명률(大明律)》 등 여러 법전에서 사송(詞訟: 민사 재판)에 필요한 조문을 뽑은 민사 소송법서 《사송유취(詞訟類聚)》(1585)의 등장으로 수령이 송사에 대비하는 구체적인 지식을 갖추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는 18~19세기 지방관이 지방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연구한 학문 체계인 목민학(牧民學)의 효시로 꼽힌다. 


□ 조선시대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을 아우른 유일한 소송법서

《사송유취》가 나온 후 《결송유취(決訟類聚)》(1649)가 편찬되었지만 그 내용은 거의 동일했다. 다시 약 60년이 흐른 1707년(숙종 33) 의령현감 이지석(李志奭)은 《결송유취》를 증보한 《결송유취보》를 편찬했다. 《결송유취》를 증보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송유취보》는 독자적인 책이었다. 

먼저, 내용 면에서 《결송유취보》는 42조목 516조문으로, 《결송유취》(24조 250조문)에 비해 2배 이상 방대하다. 또 성격 면에서 《결송유취보》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민·형사 소송법서로, 《결송유취》의 민사 재판 내용에 옥송(獄訟: 형사 재판) 관련 내용을 포함했다. 이는 《결송유취보》가 전체 조문 가운데 3분의 1만 《결송유취》에서 가져오고, 나머지 3분의 2는 조선시대 현행법·보통법으로 적용되었던 《대명률》과 개별 법령을 모은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에서 조목과 조문을 가져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양형에 따라 신체에 가하는 형벌을 체계화한 <오형도(五刑圖)>와 재물을 내고 형 집행을 면제받는 규정을 정리한 <수속도(收贖圖)>를 수록하여 형사 소송법서의 면모를 온전히 갖췄다.

□ 양란 이후 변화된 조선의 사회상을 담아낸 《수교집록》
 
조선은 16~17세기 양란을 치르면서 많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먼저 사회적으로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뿌리를 내리며 가부장적 종법 질서와 사족 중심의 지배 체계가 강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상품화폐경제가 급속히 확산되고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신분제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던 부세 제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는 잦은 쟁송(爭訟)과 잡범(雜犯)의 성행으로 이어졌고, 조선은 이 같은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수시로 수교를 내렸다. 

하지만 사회 변화에 맞춘 법령 재정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교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자는 긴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수교집록》이 편찬되는데,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1543, 중종 38) 이후 약 150년 만이다. 《수교집록》이 의미가 있는 것은 10년 뒤 발간되는 《결송유취보》의 마중물이자, 17세기 변화된 사회상을 담을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 소송 절차 규정을 강화하여 한 단계 진전한 법률서 《결송유취보》

조선은 예(禮)로 다스려 형벌과 다툼이 없는 ‘무송(無訟)의 경지’에 이른 사회를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신분과 관계없이 억울한 사람이면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 그런데 소송 절차 규정이 육전 체제에 따라 흩어져 있어 실제 소송에서 법을 적용하기 어려웠다. 《결송유취보》에는 소송 절차법이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수록됨으로써 조선 후기의 법률적 요구가 잘 반영되었다. 

《결송유취보》의 <물허청리(勿許聽理)>, <청리(聽理)>, <문기(文記)>, <호적(戶籍)>, <결송일한(決訟日限)>, <작지(作紙)>, <금제(禁制)> 등의 조목은 청송(聽訟: 송관이 분쟁 당사자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듣고 심리하는 것)의 공정성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 법률서에 비해 진전된 것이라 평가받는다. 특히 소송 절차 관련 조항을 하나로 모아 정리한 <청리>는 소송 관계 법규가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될 만큼 소송이 다반사였고, 분쟁 해결을 위한 절차법적 규정이 다수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에도 이어져 <청리>와 <문기> 조목이 신설된다. 


□  『결송유취보 역주』로 본 조선 사회의 단면과 사례

『결송유취보 역주』에 나온 조목 몇 가지를 소개한다. 이 조목은 17세기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o 첫 조목으로 수록된 <상피(相避)>는 한자 그대로 ‘서로 피한다’는 뜻을 갖는데, 일정 범위 내 친족 간에는 같은 관청에 근무할 수 없게 하거나 연고가 있는 관직에는 오를 수 없게 한 제도이다. 당시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청렴’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상피는 청렴을 최우선 덕목으로 여긴 행정적인 노력이었다. 상피는 오늘날에도 공정사회 실현의 중요한 선례로 자주 소환된다. 

o 사족과 상민을 차별하는 반상제(班常制)를 엄격하게 집행하고자 하는 위정자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내용도 있다. “우리나라는 사족과 상한의 구분이 매우 엄격하다. 서인이나 노비가 자기의 위세를 믿고 사족을 능욕하거나 구타하면 전가사변(全家徙邊: 죄인과 그 가족을 평안도나 함경도로 강제 이주시키는 벌)에 처한다. -74쪽” 

o 여성의 정절을 중시했던 조선은 강간과 간음을 무겁게 처벌했다. “강간하면 교형(絞刑: 죄인의 목에 형구를 사용해 죽이는 형벌)에 처한다. 미수에 그쳤으면 장 100·유 3,000리에 처한다. 화간(和姦)하면 장 80에 처하는데, 남편이 있으면 장 90에 처한다. 조간(刁姦)하면 장 100에 처한다. 화간하거나 조간하면 남성과 여성에게 같은 죄를 준다. -117쪽” “12세 이하의 여자아이를 강간하면 비록 합의하였을지라도 강간과 마찬가지로 논한다. -82쪽”

o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법에 관한 조목 <혜휼(惠恤)>에서 부모로부터 이탈된 아이들을 ‘버려진 아이’가 아닌 ‘잃어버린 아이’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빈민들은 각각 그 어린아이를 자신이 양육할 수 없어 유기하는 일이 틀림없이 많을 것이니, 양육을 원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의 용모와 나이를 갖추어 관에 고하고 한성부는 분명히 문안을 만들어 준다. 버려진 어린아이를 양육한 지 3개월 이내에 본주인 또는 부모나 친족 등이 되찾아 가고자 하면, 양육하는 데 든 곡식을 배로 배상하게 하고 되돌려준다. 가물로 배상하지 않거나 혹은 3개월 이후에 되찾아 가려는 경우에는 본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양육을 원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준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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