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꿀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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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꿀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시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2.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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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 한병철 지음 | 김영사 | 212쪽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제목이 눈길을 끈다. ‘혁명’이라니, 지금이 독재 시절도 아니고 제목이 너무 거창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이 제목은 저자가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벌인 논쟁(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3년이 지난 시점)을 소개한 첫 번째 글에서 따왔고, 저자가 직접 한국어판 제목으로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원제는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Kapitalismus und Todestrieb’).

‘공산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는 네그리는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에 맞선 지구적 저항의 가능성들을 열망”하면서 “다중(연결망을 이룬 저항 및 혁명 군중)”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순박한” 주장이다. 과거 “산업 사회의 체제 유지 권력”이 억압적이었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자행되는 권력은 ‘유혹적’이다. 과거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착취가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손님에 대한 환대와 친절마저 평점을 매기고 경제화하는 세상에서, “프라이마크(유럽의 페스트패션 브랜드)가 동네에 들어서면 내 삶이 완벽해질 거야”라고 소녀들이 환호하는 세상에서 ‘혁명’이라니 저자의 눈에는 가당치도 않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철 지난 이론에 기대어 디지털 자본주의의 영리한 통치 기술을 간파하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와 존엄’을 잃어가면서도 어떤 저항감이나 비판 의식도 품지 못하는 무감각한 우리 세태를 동시에 겨냥한다.

이 책의 백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생물의 파괴 본능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에세이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이다. 저자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암 덩어리들의 목표 없는 번성”이다. “생산 및 성장 도취”에 빠진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고, 생태적·사회적 재앙뿐 아니라 정신적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 한병철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베르나르 마리스(프랑스의 경제학자), 에리히 프롬과 장 보드리야르의 글을 검토하면서, 자본주의를 맹목적인 축적으로 몰아붙이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고찰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초에 생명이 없던 물질 안에서 생명이 깨어났고, 그때 발생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생명 없는 상태로 회귀하려는 충동이 생겨났다(‘죽음 충동’). 그러나 ‘죽음 충동’만으로는 인간의 ‘사디즘’을 전부 설명하기 힘들다. 한병철은 “사디즘적 폭력”의 근원에는 우리 안에 “불멸의 느낌”을 가져오는 권력 성장의 욕구가 놓여 있다고 통찰한다. “축적된 살해 폭력은 성장, 힘, 권력, 상처 입지 않음, 불멸의 느낌을 산출한다. 인간은 살해함으로써 죽음을 장악한다. 더 많은 살해 폭력은 더 적은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한병철은 자본을 “현대의 마나Mana”에 비유한다. 원시적 폭력 경제에서 마나는 상대를 죽일 때 획득하는 신비한 권력 물질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권력을 지녔다는 느낌과 상처 입지 않는다는 느낌을 산출하기 위하여 마나를 축적”했고, 마나를 즉각 몸으로 흡수하기 위해 심지어 “상대의 살을 먹었다”. 여기서 “자본의 축적은 마나의 축적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 사람들은 자본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죽음을 통제하고 있으며, 죽음에서 멀어진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죽음 없는 삶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우리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설죽은 삶, 산 죽음’의 상태로 이끈다. 죽음에 대한 히스테리적 거부는 우리를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로 전락시키고, 특히 디지털 자본주의는 우리를 생명 없는 사물로 변환시킨다(‘네크로필리아’). 우리의 “소비 행태, 가족 상황, 직업, 선호, 취향, 거주 형태, 소득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알고리즘이 ‘설죽은 우리’ 대신에 “생각한다”. 인간의 고유 능력이었던 ‘생각하기’는 ‘계산하기’로, 회상 능력은 ‘기계적인 기억’으로 대체된다.

신자유주의의 교묘한 권력 기술이 우리 삶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책에서 한병철이 그려낸 초상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로 인해 합병증을 앓고 있다. 성과사회가 만든 소진과 우울증,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이 만든 ‘총체적 감시사회’,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이 모두 사라진 ‘투명사회’(또는 ‘같음의 지옥’). 이처럼 “사물들이 모두 상품이 되고” ‘모두가 똑같고 고립된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남들처럼 셀카봉을 들고 뛰어오르는 사진으로 인스타그램을 장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왕이면 더 높이 더 멋지게 ‘최고의 상품’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에서 행복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괴로운 공허감 속에서 면도날로 팔을 긋는 아이들을 보며 “사랑을 갈구하는 외침”을 읽어낼 수 있는 철학의 언어가 필요하다.

한병철은 “인간 삶에 대한 상업의 총체적 착취에 저항하는 새로운 삶꼴” 또한 “삶과 죽음의 분리를 되돌리고 삶을 다시 죽음에 참여하게 하는 삶꼴”을 요청한다. 자본주의 비판자로서 그가 고민하는 대안적 삶의 내용이자, ‘긍정성의 과잉’에 갇힌 세상을 이겨낼 단서다. 폭주하는 디지털 자본주의에 맞설 철학적 봉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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