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새긴 발생학의 암호, ‘클림트 코드’를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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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새긴 발생학의 암호, ‘클림트 코드’를 파헤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2.0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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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림트를 해부하다: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312쪽

 

이 책은 화려한 화풍과 도발적인 시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 숨겨진 생물학적 도상, 즉 “클림트 코드”를 발견하는 책으로 인간의 탄생부터 성장, 노화, 죽음까지의 이야기를 과학과 예술의 흥미로운 만남 속에서 풀어낸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평생의 테마로 삼았던 클림트가 ‘과학의 시대’에 인간의 기원을 추적하는 발생학을 접하고, 또 그것을 그림에 녹여냈던 집요한 과정을 되짚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클림트를 비롯한 당시의 예술가들을 과학에 매료시킨 시대·문화적 배경을 살피고 2부에서는 〈키스〉, 〈다나에〉 등 클림트의 작품 속 인간 발달을 상징하는 도상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3부에선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에드바르 뭉크 등 클림트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 예술의 영감을 얻었던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 

“클림트는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라는 저자의 의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클림트를 비롯한 걸출한 예술가, 지성인들이 탄생했던 1900년대 전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이들이 활동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빈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몰락하고 입헌국가가 시작되던 시기로, 국가는 쇠락하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문화와 학술의 꽃은 만개했다. 말러와 쇤베르크의 음악, 카프카와 슈니츨러의 문학,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프로이트의 의학이 단번에 세상에 쏟아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는 이러한 시대·문화적 토양에서 클림트가 ‘인간’과 ‘과학’에 매혹되고, 이를 평생의 테마로 삼게 된 계기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제시한다. 첫째는 ‘빈 모더니즘’을 견인했던 빈의 살롱·카페 문화이며, 둘째는 현미경의 발달로 촉발된 ‘과학의 시대’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다빈치 코드’가 있었다면, 19세기 말 빈에는 ‘클림트 코드’가 있었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평생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주커칸들 교수와의 교류로 쌓은 높은 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그림에 정자와 난자, 착상, 임신, 세포분열을 상징하는 요소를 빼곡히 새겨 넣었다. 의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키스〉에서 시작해 〈죽음과 삶〉에 이르는 클림트의 모든 작품은 인간이 태어나 죽음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발생학과 진화론적 관점에 기반해 그린 ‘연작 시리즈’인 셈이다.

이 책의 2부 역시 인간의 발생과 진화의 순서에 따라 클림트의 작품을 해부한다. 남녀가 만나 인간 발생이 시작되는 태초의 공간, 자궁을 묘사하는 〈벌거벗은 진실〉에서 시작해, 죽음 이후 생의 순환을 상징하는 〈죽음과 삶〉, 그 이후 개체의 진화를 암시하는 〈스토클레 프리즈〉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클림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그 치밀함과 집요함 속에서 그의 인간을 향한 애정과 과학을 향한 갈망이 생생히 느껴진다.

2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키스〉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황금빛 배경에서 키스를 나누며 황홀경을 경험하는 남녀의 모습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 그 이후 수정과 발달의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남성의 옷자락에는 무채색의 직사각형들이, 여성의 옷자락에는 빨간색, 보라색의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저자는 클림트가 세로의 직사각형을 남성의 성기로,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을 난자와 세포를 상징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 기반해, 〈키스〉가 표현하는 인간 발생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인다. 

과학자들은 1670년대 정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150년이 흐른 뒤에야 난자의 존재를 깨닫는다. 지금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태아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상식이지만, 당시엔 인간의 생식세포에 이미 완성된 축소인간이 존재한다는 ‘전성설’을 비롯해 다양한 가설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발생된다는 사실이 1900년대를 목전에 두고 증명되었으니, 이는 당대 뜨거웠던 과학적 발견을 예술로 녹여낸 클림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를 사랑한 해부학자’로 활동해 온 저자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발생학, 진화론, 세포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작품을 그린 화가가 또 있는가?”였다.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저자의 연구는 클림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로 뻗어나간다. 3부에서는 에드바르 뭉크, 에곤 실레, 프리다 칼로 등 총 8인의 화가가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는지 살펴본다.

오딜롱 르동과 가브리엘 폰 막스는 다윈과 헤켈의 이론을 기반으로 인간 기원을 추적한다. 르동은 〈기원〉이라는 작품에서 원시 생물체 형태의 인류 조상을 상상했고, 폰 막스는 헤켈이 주장했던 가상의 유인원을 재현했다. 에곤 실레는 〈엎드린 소녀〉 등의 작품에서 클림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수정, 발달, 탄생까지의 과정을 묘사했고 특히 ‘여성의 몸’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프리다 칼로는 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 외에 인상적인 작품을 남기며, 기존에 잘 언급되지 않았던 여성의 출산과 돌봄에 관한 내용을 작품에 녹여내기도 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몇몇 예술가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감을 작품 속에 내비치기도 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당시 대두되었던 미생물, 면역학의 내용을 작품 속에 묘사하며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생물의 발생과 진화를 인간이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자신감은 우수한 인류를 육성하려는 우생학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3부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제프 볼프의 작품들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질서와 자연의 힘을 깨닫게 한다. 들꿩의 깃털이 겨울철에는 하얗게, 여름철에는 까맣게 소리 없이 변화하는 것에서 자연이 지닌 경이로움과 파괴력을 느낄 수 있다. 볼프는 결국 자연이 생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다윈의 주장을 작품에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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