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치’ 후리소리와 짓의 기억 … 은빛 모래밭과 벽화가 있는 나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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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치’ 후리소리와 짓의 기억 … 은빛 모래밭과 벽화가 있는 나사마을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0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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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울산 울주군 나사리

 

모래가 쌓여 뭍이 되었고 모래가 뻗어 나간다고 나사리라 했다. 나사리의 너른 모래밭은 메르치 후리짓 하던 곳이다. 

멸치냄새다. 짙다. 그물들은 모두 비어 있고 멸치 삶는 솥 하나 보이지 않는데, 오만 데에, 온갖 곳에, 아니 아예 온 마을에 멸치냄새 짙다. 아주 옛날, 마을은 낚시터였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모래가 계속 쌓여 뭍으로 변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인조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바다가 육지가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은 듯하다. 정조(正祖) 때 나사리로 불렸다는데 처음에는 ‘모래가 뻗어 나간다’고 ‘나사(羅沙)’라 하다가 이후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서 ‘나사(羅士)’로 변했다고 여겨진다. 얼핏 보아도 사람이 살 만한 땅은 작아 보인다. 대문 앞에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등 뒤로는 낮은 산이 바짝 붙어 있는, 어느 집에 살든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담벼락마다 그림이다.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는 동화 세상이다. 마을의 유래도 적혀 있고 물고기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담벼락마다 그림이다.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는 동화 세상이다. 마을의 유래도 적혀 있고 물고기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옛날 나사마을에 ‘둥치’라는 어부와 ‘소’라는 착한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둥치가 사람 머리만 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소가 시어머니를 위해 정성껏 고기를 삶았더니 크기가 주먹만 해지더란다. 시어머니는 먹고 남은 것을 가져왔냐며 호통을 치고는 며느리를 쫓아냈다. 얼마 후 둥치가 다시 그 물고기를 잡아 삶았는데 역시 크기가 주먹만 해졌다. 둥치는 아내가 가여웠다. 마침 마을에 미친 여자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둥치는 혹여나 하고 여자를 찾아 나섰다. 바로 아내였다. 둥치는 왜 군소리라도 해 보지 않았냐며 슬퍼했고 그때부터 그 물고기를 군소라고 불렀단다. 

 

마을 담벼락마다 그림이다.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는 동화 세상이다. 마을의 유래도 적혀 있고 물고기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나사항 전봇대에 ‘나사마을 특산물 미역, 다시마, 멸치’라고 적혀 있다. 자연산 미역을 판매한다는 안내도 여기저기 붙어 있다. 나사리는 1970년대까지 멸치를 잡고 돌미역을 채취하며 살아가던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품삯을 나누던 공동체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메르치’가 찾아왔다. 먼저 망보는 배가 바다로 나가 메르치가 있나 없나 살폈다. 멸치 있는 자리에는 갈매기가 날았다. 잡아먹으려고. 메르치가 오면, 밭일을 하던 노인이든 빨래를 하던 처녀든 모두 모래사장으로 모였다. 바다에 그물이 넓게 둘러쳐지면 사람들은 그물의 양쪽 끝을 잡아당겨 그물 안에 갇혀 펄떡거리는 메르치를 모래사장으로 당겨 올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린 학생도, 동네를 지나치던 나그네도 모두 힘을 합쳐 그물을 당겼다. 그물을 당기고 나면 ‘짓’을 받는다. 방금 당겨 올린 멸치다. 

 

멸치 있는 자리에는 갈매기가 날았다. 잡아먹으려고. 모래밭의 갈매기 떼는 꼼짝도 않고 바다만 바라본다. 멸치를 떼를 기다리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멸치를 잡는 방법을 후리그물 또는 후리짓이라 한다. 후리짓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메르치를 골고루 나누어 주고 나서야 멸치막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삶기 시작한다. 삶은 멸치는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부터 널어서 말렸다. 말린 멸치는 종이포대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장에 팔러 갔다. 이 모든 과정이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어졌다. 나사리의 너른 모래밭은 메르치 후리짓 하던 곳이다. 모래밭의 갈매기 떼는 꼼짝도 않고 바다만 바라본다. 멸치를 떼를 기다리는 게 분명하다. ‘예야 예야 예야 예야’ 멸치 후리는 노래 중 그물을 빨리 내리는 소리라 한다. 이 또한 마을 벽화가 알려 준다. 두근두근 급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을 담벼락마다 그림이다.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는 동화 세상이다. 마을의 유래도 적혀 있고 물고기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마을의 북쪽 끄트머리 높은 곶 위에 등대가 서있다. 나사 등대다. 등대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데크 산책로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등대 일대를 ‘대장끝’이라 부르는데 미역을 채취하는 곳이다. 나사리 미역밭은 북쪽 ‘납닥돌’부터 남쪽 ‘안섭잘’까지로 모두 다섯 개의 ‘미역돌’이 있다고 한다. 독바우, 솔안, 여담네밭밑에, 대장끝, 앞바당이다. 마을 사람들은 음력 8월 중에 ‘미역돌’을 나누고 1년 동안 차지하는데 이를 ‘제비 뽑는다’고 한다. 미역돌을 1년 동안 차지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곽주’(藿主)‘라 했다. 주인이 되었으니 돌을 보살펴야지. 곽주들은 음력 9월과 10월 중에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고 정월과 음력 2월에 미역을 땄다. 그리고 더미더미로 쌓인 미역을 ’짓가리‘했다. 나누었다는 뜻이다.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일, 믿음과 규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사등대가 서있는 일대를 ‘대장끝’이라 부르는데 나사리 미역돌 중 하나다. 등대 주변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br>
나사등대가 서있는 일대를 ‘대장끝’이라 부르는데 나사리 미역돌 중 하나다. 등대 주변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나사리 해안은 지난 20년 전부터 모래의 침식과 퇴적이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여름철에는 나사 해안의 모래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겨울철이 되면 다시 모래가 나사 해안으로 돌아온다. 모래 높이의 차이는 2~3m 정도, 무서운 차이 아닌가? 모래가 떠나는 시기에는 파도의 속도가 빨라진다. 무섭게 달려온 파도는 마을을 덮치고 태풍이 오거나 너울이 높을 때면 상처는 더욱 크다. 나사리에는 2개의 등대가 더 있다. 모두 예쁘기로 유명하다. 붉은 등대는 나사항 방파제 등대다. 하얀 몸에 파란 모자를 쓴 등대는 나사 방사제 등대다. 방파제는 파도를 막고 방사제는 모래의 이동을 막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마을 앞 바다 속에는 이안제가 숨어 있다. 파도에 맞서고 파도를 다독이는 구조물이다. 그러나 2023년에도 자연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나사등대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데크 산책로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br>
                  나사등대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데크 산책로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나사리 일대는 향후 10년 이내로 어업이 종료된다고 한다. 울주문화원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기억 등을 모아 마을의 오래된 이야기들을 아카이빙 하고 있다. 멀리, 그러나 바다 너머 가깝게, 신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희부윰하다. 저기 마을 끄트머리 언덕진 자리에 나무 한 그루가 오롯이 높다. 그 곁에 씩 웃는 듯한 기와지붕 보인다. 쓱 보아도 당산인줄 알겠다. 총총, 찾아뵈려 오르니 담 높고 커다란 철문이 단단하다. 들여다 볼 틈 하나 없다. 까치발로도 어림없다.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겠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의지’한다는 의미일 게다. 넓은 모래밭에 갈매기들이 부동이다. 일제히 바다를 향해 서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마을 끄트머리 언덕진 자리에 나무 한 그루가 오롯이 높다. 그 곁에 씩 웃는 듯한 기와지붕 보인다. 멀리서 보아도 당산인줄 알겠다.<br>
마을 끄트머리 언덕진 자리에 나무 한 그루가 오롯이 높다. 그 곁에 씩 웃는 듯한 기와지붕 보인다. 멀리서 보아도 당산인줄 알겠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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