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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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2.0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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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28강_ 양혜림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의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28강 양혜림 교수(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양혜림 교수는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서로 “대립항이 되려면 대중 문화와 저급 문화, 고급 문화와 엘리트 문화가 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나 실제로는 이 개념들이 “일상에서 혼용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먼저 “이러한 개념의 혼란을 최대한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는 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청중에 초점을 맞춘 개념인 대중 문화의 두 가지 맥락을 통시적으로 살펴본 후, 문화의 본질적인 면에 천착하는 고급 문화의 개념을 취향의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결국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그리고 각각의 유관 개념들이 나선을 이루며 하나의 현상으로 합쳐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누가 대중인가”, “무엇이 높은가”, “여전히 높은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이루고 있다. 끝으로는 “디지털 매체가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의 경계에 미친 영향과 현황을 대중 문화인의 관점에서 거칠게 조망”하면서 “그러나 평평하지 않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지난 1월 13일, 양혜림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2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며

고급 문화의 반대말은 저급 문화(low culture), 향유 주체를 기준으로 한 개념인 대중 문화의 반대말은 엘리트 문화(elite culture)로 가정할 수 있다. 만약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가 대립항이 되려면 대중 문화와 저급 문화, 고급 문화와 엘리트 문화가 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개념들은 일상에서 혼용되는 경향이 있다.

청중에 초점을 맞춘 개념인 대중 문화의 두 가지 맥락을 통시적으로 살펴본 후, 문화의 본질적인 면에 천착하는 고급 문화의 개념을 취향의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결국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그리고 각각의 유관 개념들이 나선을 이루며 하나의 현상으로 합쳐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매체가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의 경계에 미친 영향과 현황을 대중 문화인의 관점에서 거칠게 조망해보고자 한다.

 

2. 누가 대중인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보는 표현이 대중(mass)으로, 이 맥락에서의 대중(mass)에는 개별성이 없으며 주체성이 없고, 따라서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담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중이 소비자본주의의 주체로 빠르게 부상하고 대중 매체에 의한 대중 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하자 여러 학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관심과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 매체를 통한 각종 콘텐츠 향유가 대중으로부터 자생한 진정한 문화가 아닌 대량 생산된 ‘문화 상품’의 수동적 소비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대중 문화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1960년대 전후 레이먼드 윌리엄스 등의 영국 문화 이론가들은 대중과 문화의 관계를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대중이 문화의 수혜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 속에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라는 입장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는 부정적으로 본 문화 상품의 수동적 소비가 문화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문화의 창조를 실행하는 능동적인 대중의 모습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대중 문화가 파퓰러 컬처(popular culture)라는 새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이후 자율성 없고 수동적이라는 경멸적 의미가 담긴 대중(mass) 대신 많은 사람들이 향유한다는 의미의 대중성(popular) 개념을 사용한 문화 연구가 보편화되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을 대중 문화라 한다면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소수의 권력자 계층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 즉 엘리트 문화라 볼 수 있다.여기서는 사회적 권력을 인정받는 소수의 사람으로 엘리트를 간략히 정의하자.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공공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경제적 부? 지적 능력? 인지도? 사회적 지위? 지적 능력, 인지도, 사회적 지위는 경제적 부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엘리트 문화는 소위 ‘있는 자’ 들의 문화인가? 부를 갖춘 자들의 문화가 곧 고급 문화인가? 향유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화가 본질적으로 우월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우월한 문화는 존재하는가?

갠스(1974)는 ‘취향 문화(taste culture)’라는 말로 문화의 우열을 부정한다. 이른바 문화적 다원주의의 맥락으로,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저 취향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그는 여전히 고급 문화(high culture), 중급 문화(middle culture), 하급 문화(low cultur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하급 문화의 향유자는 고급 문화를 접하거나 공부할 기회가 박탈되어 해당 취향을 갖추지 못한 경우라고 풀이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고급 문화를 선택하고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교육적 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에 진정으로 우열이 없다면 이러한 정책 또한 불필요할 것이기에 갠스가 말하는 심미적 다원주의(aesthetic pluralism)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높고 낮음을 전제하는 다양성을 진정한 다양성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무엇이 높은가

우리가 고급 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은 무엇인가? 더 고급한 취향 문화일수록 더 바람직하고 좋은 문화일 수 있다는 말로 갠스는 고급 문화의 심미적 우월성을 단언한다. 두 번째로 희소성이 가치를 높이기에 고급 문화로서의 입지가 굳어지는 것이라는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어려움의 정도가 곧 문화의 높이라는 가설이다. 여기에 반드시 덧붙여야 하는 수용자 측면에서의 어려움은 비용이다. 하지만 이들이 곧 고급 문화의 기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고급 문화는 높이 올라서야 비로소 즐길 수 있는 문화다. 무엇을 타고 올라갈 것인가? 수용자가 일생 동안 쌓아 올린 취향(taste)이다. 문화(culture)는 재배, 배양(cultivate)과 같은 어원을 지니며, 이를 향유하기 위한 취향 또한 개인의 일생에 걸쳐 자라나고 길러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 자본은 문화 자본으로 전환되고, 가족을 통한 문화 계승과 학교에 의한 문화 계승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학력 자본을 형성한다. 학력 자본은 다시 사회 전반에 걸친 연결망, 즉 ‘인맥’의 형태가 되어 자녀가 사회 자본을 갖추는 데 기여한다. 지식, 교양, 취미, 감성과 같은 문화 자본이 계급의 무의식적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길러진 계급적 취향은 자연히 고급 문화를 향하며 고급 문화의 권위는 다시 이들에 의해 지켜진다. 즉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취향과 생활 양식을 우월한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다른 계급을 배제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계급을 재생산한다. 문화는 자본이며, 취향이라는 장벽을 높이 세워 타 계급의 진입을 막을 때 희소성과 함께 자본의 가치가 올라간다. 즉 문화의 향유자들이 직접 해당 문화의 우열을 결정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급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저급 문화(low culture)라는 용어는 보통 자조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는 대중 문화(mass culture/popular culture)라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고급 문화의 ‘높이’가 창작과 수용을 위해 넘어야 하는 진입 장벽을 암시한다면 저급 문화에는 문턱이 없거나 매우 낮을 것이다. 즉 저급 문화에 있어서 ‘낮은’ 것은 도덕성, 지적 가치, 예술적 세련미가 아닌 진입 장벽이라는 가설이다.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문화를 우리는 대중 문화라 부른다. 즉 저급 문화가 모두 대중 문화인 것은 아니나, 낮은 문턱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받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음은 분명하다.

 

4. 여전히 높은가

온전한 쌍방향 소통이 보장되지 못하던 웹1.0을 지나 사용자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웹2.0을 맞이한 대중은 본격적으로 문화의 생산자로 등극한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얼마 안 가 소셜 활동은 모두의 일상이 되었다. 한국인 모두의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가 빠른 속도로 확장된 시기라 할 수 있다.

홉스(2013)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지식이 본질적으로 변화하면서 리터러시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확장된 현대의 리터러시를 ‘기호(symbol)를 통한 의미 공유’로 정의한다. 즉 글뿐만 아니라 이미지, 글과 이미지의 결합, 영상, 게임, 웹사이트, 채팅, 가상현실 등 무수한 매체들이 텍스트로서 존재하며, 이에 대한 읽기와 쓰기 또한 리터러시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문화 자본과 학력 자본을 획득하는 지름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프 애호가 카페에서는 초보자를 위한 강의를 열고 ‘정모’ 정보를 공유한다. 오페라나 발레 공연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전문가의 해설 영상도 다수 존재한다. 외국어 학습이 전례 없이 쉬워진 시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페라를 독학한 일반인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고,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미술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는다. 게이트키퍼의 역할을 수행해온 기성 평론가의 권위가 줄어든 대신 누구나가 개인 SNS를 창구 삼아 평론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대다.

비단 학습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확고부동한 고급 문화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골프 문화는 다양한 측면에서 대중에게 꾸준히 노출되면서 심리적 장벽을 낮춰왔고, 결국 지상파 TV에서도 골프 예능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시작하면서 골프가 대중 문화의 영역에 들어왔다. 취미로 유화를 그리는 것이나 외국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 관람, 대학원 진학이 이전만큼 고급 문화로 여겨지지 않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5. 그러나 평평하지 않다

기존 향유층의 비호를 받으며 권위를 지켜온 고급 문화가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은 명확하다. 더 이상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경계를 의식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높고 낮음은 상대적 개념이며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견주어 판정을 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 고급’ 문화를 판별하여 레이블을 붙인다.

존 시브룩(2000)은 저서 『Nobrow』에서 이러한 접근에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문화가 갖는 경향성은 엘리트적 교양과 희소성을 갖춘 highbrow도, 상업적인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하는 lowbrow도 아닌 nobrow임을 주장하는 제목 그대로, 시브룩은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모호한 경계가 상업 맥락에서 뒤얽히는 현상을 설명한다. 실종된 문화적 위계 대신 우열의 잣대가 되는 것은 ‘버즈(buzz)’, 조금 더 친숙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좋아요’다. 버즈는 단순히 대중적인 인기를 넘어 확산의 개념을 포함한다. 소비자가 직접적인 구매나 소비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문화의 권위가 높아진다.

시브룩의 주장은 얼핏 시장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대중 문화의 개념에 가까운 듯 보이나 버즈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산업이나 자본가의 힘이 아닌 대중 그 자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빠르게 포착하여 따라가는 것 정도이다. 선도하는 것은 대중, 더 정확히는 ‘개인들’이다. 지금은 오래 축적되어 굳어진 것보다 끓어올라 넘쳐 흐르는 것이 강하다. 영향력이 곧 힘이며, 힘을 얻기 위해서는 ‘힙’하고 ‘핫’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로워의 수, 좋아요의 수, 리트윗의 수가 권력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건조한 진술에 가깝다. 

 

6. 나오며

오늘날의 개인은 수동적인 수용자(audience)의 위치를 넘어 유통자와 생산자의 역할을 겸하는 사용자(user)로서 기능한다.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여 부족을 이루며, 각 부족은 고급 문화의 수용자층이 진입 장벽을 쌓아올려왔듯 자신들이 디딘 땅을 깊숙이 파내려간다. 

과거 매스 미디어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성립하도록 소비자들의 취향을 획일화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지금의 미디어 플랫폼은 그럴 필요가 없다. 파편화된 취향을 정밀하게 조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집단의 취향은 알고리즘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개개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플랫폼은 트래픽을 벌어들이며 ‘좋아요’를 얻고 싶은 창작자들과 공생하고 극단화를 무언으로 독려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참과 거짓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가치의 경중 역시 우선순위에서 취향에 밀린다. 우리는 파내려간 개미굴 속에서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해 발걸음을 옮기나 방향성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개인 미디어를 통해 무한히 밀려드는 타인의 취향에 수시로 잠식되는 탓이다. 따라서 취향은 고급 문화에 범접할 만큼 높이 쌓이지 않으며 문화 자본은 난잡한 형태로 축적되어 문화 생산의 마중물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 모든 현상을 우리는 더 이상 생산자와 미디어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대중이라는 말 뒤로 숨을 수도 없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사용자가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선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민성(digital citizenship)이 강조되는 이유다.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가 곧 우리의 문화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양혜림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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