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는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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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는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나
  • 임영호 부산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4.01.2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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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미디어와 시대정신의 탄생: 20세기 미디어 사상사』 (대니얼 J. 치트럼 지음, 임영호 옮김, 컬처룩, 424쪽, 2024.01)

 

오늘날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전통 매체는 갈수록 수용자와 영향력을 잃어가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는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미디어’ 개념 자체까지 바꿔놓고 있다. 포털과 유튜브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을 대폭 약화시켰고,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지금까지 정보와 콘텐츠를 생산하던 인간의 역할까지 대체하고 있다. 현재 미디어의 모습뿐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상도 매일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이가 동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테크놀로지가 초래할 미래 모습에 대해서는 온갖 상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넘어 그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근본적인 변화의 방향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예컨대 지금은 가상 현실 테크놀로지가 보급되면서 현실과 가상에서의 경험이라는 구분이 흐려지고, 인공 지능은 인간의 사고와 노동 영역을 컴퓨터 알고리즘이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단기적 기준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 국가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근거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미디어와 시대정신의 탄생: 20세기 미디어 사상사>는 오늘날과 같은 변화의 시대를 읽어내는 데 좌표로 삼을 만한 긴 안목을 제공해준다. 미국 문화사와 정치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역사학자 대니얼 J. 치트럼은 이 책에서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변화가 현대 사회사상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면서, 거시적인 사회문화사의 시각에서 20세기 미국 커뮤니케이션의 지성사를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저자는 전신, 영화, 라디오 등 20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미디어의 등장 과정을 살펴보면서,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서 어떤 진보적 가능성을 기대했으며, 실제로는 그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지배와 착취의 수단으로 변질했는가 하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크게 보면, 이 책의 전반부가 각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는 과정과 더불어, 그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한 당시 일반 시민과 지식인의 반응을 분석한 ‘사회문화사’에 가깝다면, 후반부는 당시의 대표적인 사상가와 이론가가 미디어를 통해 어떤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체계화했는지에 관한 본격적인 ‘지성사 intellectual history’를 다룬다.

우선 치트럼은 전반부에서 20세기 초 전신, 영화, 라디오가 발명되어 급속도로 대중화되는 과정을 기술하면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대한 대중적 반응을 포함해 당대의 대응 양상을 묘사한다. 치트럼은 전신으로 논의를 시작했는데, 이는 전신이 처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교통과 분리한 미디어였을 뿐 아니라 전자 매체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신은 당시 고립된 지리적 공동체 단위에 묶여있던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관을 혁명적으로 바꿔놓고 새로운 미래상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 신기술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치트럼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소재이기도 하다. 치트럼은 각 미디어가 도입되던 무렵의 시대상을 당시의 자료를 통해 자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어, 사회문화사로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해 후반부에서는 현대 미디어의 전반적 영향에 관해 미국의 사상에서 등장한 세 가지 주요 전통을 고찰한다. 치트럼은 미국의 진보 시대 the Progressive Era를 대표하는 사상가 찰스 호턴 쿨리, 존 듀이, 로버트 파크가 현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총체적 성격에 관해 시도한 선구적 탐구를 시작으로, 행태과학으로서 경험적 미디어 연구의 등장, 해럴드 이니스와 마셜 매클루언의 급진적 미디어 이론에 이르기까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역사 과정이 당대의 시대 정신과 사상가의 사고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살펴본다. 가령 쿨리, 듀이, 파크의 저작은 전통적 공동체가 붕괴하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표되는 급격한 사회 변동 과정에서 지리적 거리를 초월한 새로운 공동체 구축에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당대 지식인의 고민을 가감없이 드러내준다. 미디어에 관한 이 사상가들의 논의는 당시 이들이 어떤 관점에서 시대적 변화를 읽어냈으며, 이러한 해석이 당대인의 세계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은 대니얼 치트럼의 초기작 Media and the American Mind: From Morse to McLuhan을 옮긴 것이다. 40여 년 전인 1982년에 출간되어 오랫동안 미디어와 사회문화사 관련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미국 대학에서는 전문 학술서에 그치지 않고 학부 강의교재로도 널리 사용되면서 사회 다방면에 영향을 미친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외국어라는 언어 장벽 때문인지, 역사적/지성사적 시각에 대한 무관심 탓인지 국내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 초 전신, 영화, 라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는 과정을 추적하지만, 단순히 역사적 사건 서술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여러 사상가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가 초래한 우려와 문제점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미래를 상상했는지에 초점을 둔다. 말하자면 이 책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세 미디어의 등장과정 분석을 통해 미디어 사회사이자 지성사에 관한 선구적인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이 책의 가치는 다루는 소재보다는 현상을 접근하는 독특한 접근방식에 있다.

원저가 나온 지 40여 년이 지나고 당시의 주류 미디어이던 신문과 방송이 사양길에 접어든 지금에야 뒤늦게 이 책을 번역서로 소개한다. 그렇지만 이 ‘오래된’ 책이 갖고 있는 시사점은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적 거리두기를 통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준다고 믿는다. 치트럼의 책은 20세기 초반 당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과정을 다루지만, 책을 읽다 보면 때때로 그의 논의는 1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마치 현재 상황에 관한 비판적 진단처럼 들린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성찰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는 테크놀로지의 가능성과 한계를 긴 역사적 관점에서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간 학문으로든 직업으로든 미디어에 몸담은 이들이 늘 시류만 좇는 바람에 긴 호흡의 사색과 성찰 작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뼈아픈 비판이 종종 나왔다. 아마 이러한 질책이야말로 번역을 결심하게 된 이유이자, 이 오래된 책의 시대적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잠시 멈춰서서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는 정신적 여유는 단지 흘러간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대비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치트럼의 사회문화사와 지성사 작업에 깃든 지혜는 불확실한 변화와 미래를 목적에 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익할 것이라고 본다.

 

임영호 부산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부산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 교수.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널리즘, 문화연구, 이론의 지식사 등을 연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왜 다시 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지식의 장, 학문의 제도화: 한국 언론학의 정체성 탐색》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문화와 사회를 읽는 키워드: 레이먼드 윌리엄스 선집》, 《문화, 이데올로기, 정체성: 스튜어트 홀 선집》, 《위기 관리: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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