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 전의 시간 여행, 송나라 서긍의 고려 여행 따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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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전의 시간 여행, 송나라 서긍의 고려 여행 따라가기
  • 문경호 공주대·역사교육
  • 승인 2024.01.2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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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문경호 지음, 푸른역사, 352쪽, 2023.12)

 

고려로 가는 타임머신, 『선화봉사고려도경』

역사가들에게 사료는 과거를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유물·유적을 통해 그들의 의도와 행동을 분석하고 복원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모호하고 불친절하다. 그나마도 일상적인 것에 관한 기록은 터무니없이 적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남긴 여행기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들의 눈에 비친 이방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느낀 낯선 감정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인들을 보는 것과 많이 닮았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내용들이 외국인들의 기록에서 더 자주 확인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하 『고려도경』)』도 그중의 하나이다. 서긍은 1123년 송에서 파견한 국신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와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렸다. 9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고려의 풍경과 고려인들의 모습, 그리고 생활 풍속 등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고려도경』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현재의 우리가 900년 전 고려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긍 일행이 고려에 온 목적은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예종의 빈전에 조문하고, 다급해져가는 국제 상황에 맞서기 위해 고려 왕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송 휘종은 사절을 고려에 보낼 때 몸소 예종을 추도하는 글을 쓰는 등 고려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을 들였다. 당시 여진이 세운 금이 거란을 물리치고,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송 휘종의 마음은 급하고 간절했다.

서긍은 이때 고려에 한달 남짓 머물면서 고려의 풍경과 고려인들의 모습, 궁궐과 관아의 모양, 각종 기물들의 모습을 상세히 그려 송 황제에게 바쳤다. 비디오와 카메라가 없던 시기 서긍이 그려 바친 고려의 자연환경과 고려인 모습은 휘종이 고려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은 어떤 책인가?

『고려도경』은 총 40권, 29개의 대항목과 301개의 소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에는 서긍이 지은 서문이 있고, 끝에는 서긍의 조카 서천이 지은 발문과 장효백이 지은 서긍 행장이 있다. 본문의 내용은 고려의 역사와 영토, 고려왕의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서긍이 고려에 와서 본 궁궐, 관아, 사원, 인물, 풍습, 생활용품 등 다양하다.

서긍 일행은 1123년 3월에 송나라 수도 개봉을 출발하여 6월 12일에 예성항에 도착하였다. 하룻밤을 벽란도에서 묵은 일행은 이튿날 개경에 들어가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고, 각종 의례와 연회에 참석을 한 후 7월 15일에 송으로 돌아갔다. 약 한 달 정도를 개경에 머물다가 돌아간 셈이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서긍이 고려에 관한 정보를 그처럼 많이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고려에 다녀간 사신들이 남긴 『계림지』, 『계림유사』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문에 나타난 것처럼 서긍은 고려에 오기 전 그들이 남긴 서적을 미리 읽고, 고려의 전반적인 사항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도경』에서는 궁궐이나 관아 건물이 이전에는 있었는데 없어졌다던가, 이전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을 새로 기록한다는 내용 등이 종종 확인된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앞서 제작된 서적들이 문자로만 기록된 것에 비해 『고려도경』은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넣어 이해를 도왔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을 『고려도경』이라고 한 것도 처음 만들어질 때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도경』 원본은 1126년 금이 송나라 수도 개봉을 점령할 때 사라져 버렸다. 조카 서천이 쓴 발문에는 황제에게 바친 『고려도경』 외에 원본으로 추정되는 책 한 권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이웃 사람이 빌려가서 전쟁의 혼란 속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 겨우 책의 소재를 알아내기는 하였으나 찾아갔을 때에는 원본이 거의 훼손된 상태였다고 했다. 만약 온전한 『고려도경』이 남아있었다면 우리는 고려인들의 옷차림이나 일상용품, 인종과 당시 주요 인사들의 용모 등을 조선시대 풍속화나 초상화처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의 구성과 특징

『고려도경』과 인연은 맺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그때 나는 고려시대 연안항로를 연구하고 있었다. 이규보, 이색 등과 같은 문인들이 남긴 시를 살피기도 하고, 고려시대에 침몰한 선박들이 발견된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런 중에 『고려도경』의 해도편에 기록된 서긍 일행의 항로가 고려의 연안항로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해에 걸쳐 섬과 해안 지역을 답사하며 그와 관련된 흔적들을 찾았다. 서긍 일행이 중간에 정박했다는 군산도(선유도), 마도(태안 마도), 자연도(영종도) 등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고려도경』에 기록된 섬 이름과 현재의 섬이름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답사를 하고 논문을 쓸 때마다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려도경』의 그림 부분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혹 다른 연구자들이 『삼재도회』에 실린 그림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사진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작 서긍이 본 풍경이나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쉬움을 그림으로 그려 해결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오랜 결정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 맘처럼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직접 그릴까 생각했지만 여러 차례 재능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다가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서긍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사진으로 찍거나 일제강점기 또는 최근에 찍은 개성 사진에 서긍의 기록을 더하여 내가 대략 스케치를 하면, 화가인 김영주 선생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 책에 실린 20여 점의 삽화들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삽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과 비판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연구성과가 더 축적되고 책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면 그런 한계도 점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이 완성되고, 내용 집필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무렵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고려도경』 자체가 너무 간략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오래전 그것도 중국인이 고려에 와서 쓴 글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과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런 내용에 그림을 추가한다고 해도 이전에 발행된 서적들과의 차별성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 생각 끝에 글의 구성을 통째로 바꿔 보기로 했다. 고려에 대한 설명과 인물, 풍속, 사행 여정의 순으로 된 목차를 시간순으로 재구성하고, 그가 여행 과정에서 느꼈을 것 같은 감정들을 추가했다. 행장의 내용을 풀어서 서긍의 일대기를 앞에 배치하기도 하였으며, 중간중간에 당송 시기의 한시를 넣어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보니 전체적인 내용이 원전과 소설의 중간쯤 되는 글이 된 것 같다. 『고려도경』을 재해석한 글은 많지만, 서긍의 입장에서 여정 전체를 흐름대로 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풀어낸 책은 이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책의 내용을 풀어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긍이 본 장면을 다시 그리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군산도의 군산정에서 고려인들과 송나라 사신이 만나는 장면, 고려인들이 송나라 사신단을 맞이하기 위해 벽란도에 모인 장면은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다시 그렸다. “군산정은 바닷가에 있고 뒤로 두 봉우리에 의지하여 세워졌다. 그 두 봉우리는 나란하게 우뚝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수백 길이나 된다”는 장면은 서긍이 본 지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1만여 명 정도 되는 고려인들이 병장기를 들고 갑옷과 말을 갖추고, 깃발과 각종 의식용 도구를 가지고 해안가에 차례로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서 있었다.”는 구절도 표현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나마도 섬이나 산은 사진과 비슷하게 그릴 수 있었지만 서긍이 본 인종의 모습이나 김부식, 이자겸 등의 인물화는 그리려다가 도중에 그만두었다. ‘살진 얼굴에 몸이 장대하였으며, 얼굴색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는 김부식의 얼굴은 아무리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도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준영정을 참고하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서긍의 기록과 표준영정 속 김부식의 얼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 한 가지, 책이 마무리될 무렵, 민족문화유산연구원 한성욱 선생님이 서긍의 친필 석각 사진을 찍어다 주신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선생님은 책의 마무리가 한참일 때 항저우 박물관에 친필 석각 탁본 사진을 가진 분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직접 항저우에 가셔서 친필 석각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셨다. 본문에 서긍의 친필로 소개한 영은사 비래봉의 송나라 석각 탁본과 사진은 그런 인연으로 실리게 된 것이다. 석각에는 ‘노공필, 부국화, 서명숙 등이 선화 5년(1123) 4월 기해일에 다녀갔다’라는 글귀가 전서체로 쓰여 있었다. 노공필은 국신사 노윤적, 부국화는 부사 부묵경이며, 서명숙은 서긍(명숙은 서긍의 자)이다. 앞뒤 날짜를 고려하니 그들이 비래봉에 갔던 4월 기해일은 4월 16일이었다. 비문의 발견으로 서긍이 해서와 행서는 물론, 전서도 잘 쓴 명필임을 알게 되었다.


나오면서

회남자 설림훈 편에 “옥하(玉瑕)”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도 얼룩이 있고, 옥에도 티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없애려다 깨뜨린다는 말이다(若珠之有類 玉之有瑕, 置之則全 去之則虧). 그림이 사라진 『고려도경』은 옥에 티가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아쉬워 막상 그림을 그려 넣었지만 다시 보니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섣부른 욕심과 조바심이 『고려도경』이라는 옥을 더 흠나게 한 것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계기로 여러 연구자들이 좀 더 원본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내는 시도를 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으리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물론, 중국 어디엔가 잠들어 있는 『고려도경』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문경호 공주대·역사교육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사학과와 역사교육과에서 학위를 마쳤다. 지은 책으로는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2023),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2014),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2018 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1323년 왜구 침입 기사를 통해 본 신안선의 항로와 침몰일」, 「1123년 서긍의 고려 항로와 경원정」, 「여말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 「태안 마도 1호선을 통해 본 고려시대의 조운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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