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쓴 세계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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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쓴 세계영화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1.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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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역사: 운동과 시간을 눈앞으로 당겨온 역사 | 김성태 지음 | 불란서책방 | 540쪽

 

이제까지 영화사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쓴 영화사, 유럽의 영화를 사유의 영화라는 기준에서 사조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할리우드를 산업과 상업적인 기준에 따라 기술한다. 예술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충실한 영화미학을 입증하거나 혹은 상업적 성공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갖춘 감독과 작품을 골라내어 평가한다. 어디를 봐도 '영화'의 특수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로 채운다. 지금까지의 영화사는 잘 만든 영화의 기록들이었다.

이런 시선이 오늘날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가르는 터무니없는 미적 기준을 낳았고, 현대 영화산업의 기형적 성장을 초래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주장하는 쪽과 거대한 산업적 효과를 노리는 쪽의 은근한 대립, 바로 우리 대중들의 의식 속의 기묘한 갈등이 그것의 결과라 하겠다.

이 책은 19세기 말, 영화가 나타나는 시기부터 유성영화가 등장하던 1927년까지의 영화의 역사를 다룬다. 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던 때, 영화가 태어날 수 있던 조건들을 역사적 배경과 지적, 예술적 흐름, 과학 문명의 발달을 통해 살펴보고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룬다. 당시 인류에게 영화는 무성이었다. 오히려 소리가 덧붙여진 영화를 유성영화로 따로 구분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무성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에게 나타난 ‘영화’라는 도구의 정체이다. 1920년대 첫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영화’의 삶을 추적하며 인류에게 개념으로 확립된 ‘영화’, 오늘날 영화의 개념과 다르지 않은 ‘영화’를 캐는 작업이다.

Movie, Cinema, Film. 우리가 누구나 ‘영화’라고 해석하는 단어다. 하지만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 영화는 제법 많은 정의를 가졌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구현해 낸 짧은 ‘움직임’도 영화고, 제작자들이 다루던 필름도 영화며, 서사를 가진 하나하나의 작품들도 다 영화다. 이제껏 이 의미들을 ‘영화’라는 한 단어에 뭉뚱그려 사용해 온 것이다. 우리말에 영화가 가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할 단어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한 단어로 두 개념을 통칭하면서 모든 관심을 영화 속 ‘이야기’에만 쏟는다. 서점의 영화 코너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책들로 가득하고, 심지어 영화 서적과 영화들을 예술로 분류한다. ‘영화 속 이야기’라는 문장을 뒤집으면 ‘이야기 바깥에 영화’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화사나 영화 서적들은 미학과 연출을 중심으로 작품의 서사를 해석하고 연대별로 분류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 이 책은 ‘움직임’에서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 영화의 역사란 곧 영화의 특수성의 역사다. 최초의 ‘영화’는 분명히 기계나, 상품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였다는 것. 영화들은 모두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시네마)’라는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 아니던가? 기계가 재현한 움직임이자 현상이었고, 현상에 덧대어진 서사였으며, 언제나 생존을 걱정했던 하나의 기술이자 상품으로서의 영화. 역사란 바로 그‘시네마’의 역사, 인간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영화’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 영화들을 생산하는 양식, 19세기 이후에 인간에게 나타난 표현 양식으로서의 '시네마(영화)'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영화들이 나왔으며 또한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사고가 왜 출현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그 시대에 지니는 의미, 단지 영화적 의미만이 아니라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면서 ‘어떤 영화들’을 보게 하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표현 양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사에서 언제나 미학 뒤에 감춰져 있던 과학과 철학, 돈과 산업, 시장과 노동자를 영화의 역사에 당당히 불러낸다.

 

영화의 역사는 실제로도 미학을 앞세울 만큼 고상하지 않다. 초기의 영화란 한낱 단순한 기계 생산물로서 예술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굳이 용도를 찾는다면 한량과 지친 서민들을 위로하는 심심풀이 오락물에 가까웠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돈을 따라 움직여 온 ‘상품’이었다. 영화에게 있어 예술은, 산업화 시기 유럽과 개척기의 신대륙,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필사의 노력으로 세상을 장악하며 쟁취한 하나의 결과물이었지 근원이나 본질이 될 순 없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기존의 영화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역사를 서술한다.

예술이었다면 소멸이나 도태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영화는 기술이었기에 자본 시장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돈은 신대륙 개척과 1차 세계대전을 따라 흘렀고, 영화의 운명에 많은 것을 결정했다. 영화산업의 시스템, 영화 지형과 제작 환경을 바꿨고, 상영과 관람의 방식을 바꿨으며, 수많은 제작자와 제작사를 배출해 냈다. 영화가 상품이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종의 예술인으로 여기는 감독과 배우도 당시에는 단순한 노동자였다. 이들은 전쟁과 자본이 만든 생태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연출과 편집, 스타일과 장르를 시도했다. 이로써 대륙 간 영화의 성질이 구분되었고, 같은 대륙 내에서도 곳곳에서 저마다 다른 시기, 다양한 영화들이 탄생해 사조를 이뤘다. 이렇듯 영화가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창작물로 변모해 가는 동안, 영화산업의 노동자들도 자연스레 오늘날 우러러보는 창작가와 연기자로 자리 잡는다.

영화사가 다시 쓰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미학, 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적어도 이 영화사에서는 첫 페이지가 될 수 없다. 이제 영화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왜 ‘영화’를 언제나 필름들로 이해해야만 하나? 그것은 오히려 ‘영화’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또, ‘예술 그림’, ‘예술 글’, ‘예술 음악’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이 영화에서는 유독 ‘예술영화’라는 자연스러운 합성어로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영화와 예술을 동일선상에 놓는 데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림이나 글, 음악이 기계로 구현될지언정 기계였던 적은 없는 데 반해,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이 순간까지 기술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술일 것이다. 기계가 역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에디슨과 뤼미에르의 기계가 달랐고, 유성영화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흑백영화가 색을 입었다. 그래픽이 영화를 만드는 오늘처럼, 기술을 빼놓고 영화를 말할 수는 없다. 엄밀한 시각에서 1897년 발명된 기계로부터 1927년 첫 유성영화의 탄생까지, 영화사의 초기를 세계사의 흐름에 맞춰 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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