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보쌈은 전통시대 관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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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보쌈은 전통시대 관습이었을까?
  •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 승인 2024.01.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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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에세이]

 

1. 근대인의 시선

현재 민간에서는 야담을 활용하여 ‘과부약탈[縛寡·劫寡·掠寡]’을 ‘보쌈’으로 칭하면서 그것이 일종의 관행으로서 조선시대에 만연했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심지어 과부의 재혼[再嫁·改嫁] 수단으로 보쌈을 통해 수절에서 벗어났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사극에 단골 소재로 쓰였고 최근에도 독립적인 주제로서 여러 편의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보쌈’이라는 인식이 대중화된 계기는 언제였을까? 19세기 후반 다양한 공문서에서 범죄 관련 문건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고 20세기 초반 일본제국의 사회관습 조사 시 ‘약탈혼[掠婚]’으로 보고되면서 조선의 ‘관습법(관행·풍습)’으로 이해된 듯하다. 민속학에서는 손진태가 어린 시절(1912년경) 경험담을 채록하면서 20세기에 실재 상황으로 소개하고 더 나아가 약탈혼의 유습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문학에서도 갑자기 유구한 전통으로 그려지고 재가가 금지된 상황에서 유별난 혼인풍습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과부약탈 사건은 역사학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못한 주제이다. 특히 대부분의 논자들이 과부약탈을 “조정에서 법으로 금지했다”고 하면서도 “관습이었다”는 상반된 주장을 동시에 펼쳐왔다. 과부보쌈은 과연 유구한 조선의 전통이었을까? 혹은 여성의 재혼은 법으로 금지된 것이었을까? 하지만 각종 사료의 내용은 이 같은 시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부약탈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논의된 민간자료·공식사료에서 등장하는 여러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 재혼금지설의 허구성

약탈혼의 관점에서 과부약탈(보쌈)을 설명하는 경우 대개 과부의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보쌈의 형식을 통한 구제책이 마련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 법적으로 양반은 물론이거니와 양인의 재혼을 금한 적이 없었다. 특히 과부약탈의 주 대상이 되는 양인·천인의 혼인·재혼이 자유로웠으므로 여성이 굳이 과부약탈을 통해서 재혼을 꿈꿀 이유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양반 여성의 경우 재혼 수단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 사례 역시 희소하였으며 당시 오히려 범죄로 간주되었다. 

대개 재혼 금지의 근거로 드는 것은 주자학의 이념이나 재가녀 아들의 관직 진출 제한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정이(程頤)의 비판적 입장은 고려후기 ≪명심보감≫(1305)에 수록되면서 과도하게 인용된 측면이 강했고, 관직도 모두 제한되지 않았다. 가장 명예로운 지위는 제한을 받았더라도 사족으로 살지 못하거나 관직 생활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관직은 과거가 아니더라도 이조·예조의 취재나 병조의 시취 응시가 가능했다. 이조는 음관으로, 예조는 전문직‧기술직으로, 병조는 군관 등으로 각기 진출할 수 있었다. 다만 재혼한 부인 당사자가 남편을 따라 봉작을 받거나 그 자(子)·손(孫)이 과거를 통해 문관·무관의 지위에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다. 이조차도 증손자부터 제한이 해제되었다.

더욱이 사족조차 이혼[離異]은 합법이었고 실제 성행하였으므로 재혼이 불법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 ‘정절이 권장된다’는 것과 ‘재혼이 금지된다’는 것은 별개의 사실이다. 이는 ‘도덕적 강제’와 ‘법률적 규제’를 동일시하여 생긴 혼돈이다. 사회적 압력이 커지면 법률을 능가할 수 있고 명예를 중시하는 벌열(閥閱)가문에서 정려문은 중요했으나 백성을 이루는 대다수의 양인·천인을 비롯하여 지방사족 전체까지 해당되지 않았다. 열녀에 대한 포장은 소수가 받아서 모범이 될 때 희소성이 있는 것이며 모든 사족이 수절하여 받는다면 그 가치가 높을 수 없다. 18~19세기 양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교 윤리가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었다고 하더라도 양반층에 새로이 편입한 이들이 소수 엘리트 계층이 누리던 특권을 가질 수는 없었으며, 도덕적 책무도 그에 비례하여 뒤따랐을 뿐이다. 이것은 소수의 열녀 사례가 과도하게 전체 사회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된 경우이다. 

 

3. 이야기 소재와 범죄 유형

문학작품의 묘사를 살펴보면, 실제 야담집이나 구비전승된 내용에서는 보쌈의 전형적인 모습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1964년 간행본)은 조선전기 인물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는데, 바람피운 과부·부녀자를 유혹하거나 부인을 두려워하는 소화(笑話)가 실려 있고 가장 근접한 사례를 찾아도 남성을 속이고 데려와서 혼인한 뒤 재혼하는 사례(총각보쌈) 정도이며 정작 과부보쌈은 확인되지 않는다. ≪청구야담≫(1864년 필사본)은 조선 후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19세기 고종 전반까지 포함된다. 여기서는 강제로 과부와 혼인하려는 고을 수령의 시도가 좌절된 경우가 보이지만 가장 보쌈에 근접하는 사례 역시 과부를 다른 남성으로 대체하는 풍자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물론 이는 보쌈이라는 개념을 상정해둔 변주로 보이며 이 역시 19세기 인식이 투영된 듯하다. 하지만 수록된 이야기 중 실제 범죄와 유사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고소설(古小說)인 ≪신랑의 보쌈≫(1917)·≪정수경전(鄭壽景傳)≫(1918)에서도 남자가 여성에게 보쌈당하는 형식의 풍자극이 활용되고 있는데, 이 역시 20세기 초 인식을 반영한다. 이외에도 지역별로 구비전승된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앞의 두 야담집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지역별로 변형된 사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야기 소재로서 보쌈’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음은 확인되지만, ‘범죄유형으로서 보쌈’이 일반적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실록·≪일성록≫·≪심리록≫·공문서 등 역사기록물을 살펴보아도 상황은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과부약탈 범죄가 유형화하여 확인되는 사건은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나타날 정도로 희소하다. 이 때문에 ‘보쌈’은 과연 조선시대 일반적 풍속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폭발적 증가는 오히려 고종 연간을 전후해서 등장한다. 수교 자체도 순조 연간 최초로 제정되었는데 이전까지 마땅한 율이 없다고 할 정도로 흔한 범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갑오-광무 개혁기 ≪사법품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므로 19세기 후반 혼란기에 인신약탈 행위가 맹위를 떨쳤음을 알 수 있다. 


4. 약탈 사건의 발생과 대응

≪사법품보≫에서 공통적인 현상을 살펴보면, 무뢰배를 동원하여 야밤에 여성의 집에 침입하고 강제로 여성을 묶어 매고 달아나는 형태가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대부분 먼저 여성의 강력한 저항이 이어졌고, 설령 강제로 약탈당하더라도 이내 시댁·친정·동네 사람을 모아 집단으로 추적하여서 과부를 되찾아왔다. 이는 성공적인 과부약탈(보쌈)이 대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신속한 추격으로 겁탈당하지 않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날이 밝으면 관아에도 신고가 이루어져 관련자 처벌이 신속히 행해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귀가까지 수일이 걸리기도 했으므로 일부는 강제로 겁탈당하여 돌아와서 비관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간에 집에 침입하거나 가족들이 여성을 되찾으려고 추격하다가 맞붙게 되면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경우 여성이나 가족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였고, 반대로 약탈을 주도한 사람이나 그 패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사극에서 보쌈을 개인의 애정행각처럼 낭만적으로 그려서 미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례적으로 거짓으로 중매를 자처하는 이들이 독단으로 홀아비에게 접근해서 중매를 알선하여 돈을 뜯어내거나 반대로 홀아비가 원하는 과부를 얻기 위해 뇌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이 동의했다고 생각하고 밤에 침입했다가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재혼방법이 아니라 돈을 노린 이들의 사기범죄에 불과했다.


5. 제국주의 시대 굴절된 시각

그동안 과부약탈(보쌈)에 대해 현대인은 인권침해로 여기는 게 당연하지만, 전통시대 여성은 순응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부약탈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관습 조사에서 보고되면서 마치 고유풍습처럼 이해되었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 사회과학의 영향으로 민속학에서도 고대 유습으로 풀이했고 광복 이후에도 구비문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재로 다수 등장하자 이러한 선입견은 확신으로 변했다. 

만약 과부약탈이 조선의 관습이 되려면 중죄로 처벌하거나 당사자나 가족의 격렬한 저항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녀자약탈 사례는 본인과 가족의 극렬한 저항과 탈출 그리고 관의 적극적인 처벌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법서에서 한결같이 엄벌주의를 천명하였고, 실제 판결에서도 정범은 중형(사형 혹은 종신형)으로 다스렸으며, 거짓중매에 나선 자들이나 패거리를 이루어 따른 자들을 사안에 따라 처벌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하면 가해자에게는 가중처벌이 이루어졌고 피해자에게는 정당방위를 인정하거나 가벼운 처벌로 징계하였다.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유형을 상세히 기록하고 중하게 처벌한 것은 과부약탈을 한갓 약탈혼의 풍속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엄연한 인신매매로 판단하여 엄단하고자 노력했기에 국가의 징벌판례로서 남긴 것이다. 만일 일본제국이 한말의 상황을 조사했듯이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중범죄 사례만을 모아서 대한민국의 관습으로 해외에 소개한다면 과연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까? 과부약탈은 유구한 관습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나타난 새로운 범죄유형이었을 뿐이다. 일각에서 보쌈을 전통으로 미화하는 행위는 그동안 식민지학의 시선에서 ‘전통 대 근대’를 ‘야만 대 문명’으로 보는 시각이 과도하게 이입되어 실제 역사상을 전혀 다르게 파악한 것이다.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계명대 사학과 교수. 대표 저서로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2010), ≪두 얼굴의 영조≫(2014),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2016),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2016), ≪정조의 군주상≫(2023), ≪사법품보가 그린 왕정과 인간≫(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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