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의 귀국과 상봉 … 〈한일고금비교론〉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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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귀국과 상봉 … 〈한일고금비교론〉 ⑭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4.01.2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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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전쟁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낸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전쟁 때문에 살기 위해 흩어진 가족을 이산가족이라고 한다.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많이 생겨 난 비극이 일본과 한국 양쪽에 다 있다. 이 점에서 동병상련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양쪽 이산가족의 실상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일본은 침략과 팽창을 위해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대거 해외로 보냈다. 전쟁에서 패배하자, 박해를 피해 급거 귀국해야 하는 민간인 일부가 현지에 남아 이산가족이 되었다. 한국은 이념의 차이 때문에 둘로 갈라지더니 내전이 일어나, 살기 위해 도망친 사람들이 서로 행방을 모르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일본의 이산가족은 귀국을 해결책으로 삼았다. 귀국이 쉽지 않고, 후유증이 심각해 문제가 된다. 한국의 이산가족 문제는 소식을 알고, 상봉하고,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세 과정을 거쳐야 해결될 수 있다. 이 가운데 상봉에서 진통을 겪는다. 양쪽의 사정을 비교해 고찰한다.

일본이 패망한 다음 귀국하는 민간인을 ‘引揚者’(히키아게샤)라고 한다. 직역하면 ‘건져 올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산가족을 물에 빠진 사람에 견주어 하는 말이다. 그 총수가 600만 정도까지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모두 귀국하기는 어려웠다. 귀국해도 하층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길이 막막하다.

그 가운데 중국 동북부 滿洲(만주)에서 귀국해야 하는 155만이 가장 난처한 처지에 있었다. 그 이유를 조금 설명한다. 滿洲國(만슈코쿠, 만주국)이라고 하는 괴뢰국가를 만들고 지배하기 위해 많은 일본인이 가서 횡포를 자행했다. 滿洲國을 지배하는 일본 關東軍(칸토우군, 관동군)을 깨부수고 소련군이 진격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났다. 군인은 모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민간인이라도 공무원은 같은 신세였다. 그 가족이나 다른 민간인은 박해를 피해 급히 탈출해야 했다.

일본 여성 藤原てい(후지와라테이)는 滿洲國 기상대에서 근무하게 된 남편을 따라 갔다가,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간 경과를 말한 <<流れる星は生きている>>(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1949)를 써냈다. 이 책이 즉각 <<내가 넘은 38선>>(1949)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많이 읽혔다. 어머니가 애독하면서 해준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조사한 자료를 보태, 줄거리를 소개한다.

남편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가고, 그 여성은 세 자녀를 데리고 북한을 거쳐 월남해 일본에 도착하기까지 처참한 고난을 겪었다. 17가구 49명이 1년 동안 북한에서 감금되어 고통스러운 집단생활을 했다. 질병과 영양실조로 속속 죽어가고, 더러는 미치기도 했다. 동족 일본인들의 이기적인 인간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서술도 있다. 아들이 죽게 되었다가 조선인 의사의 호의로 살아난 것도 말했다. 1946년 8월1일에 38선을 넘고, 10여 일 동안 남하해 부산에 도착했으므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행복한 사례이다. 아이들은 두고 떠나, 잔류고아 문제가 생긴 경우에는 더욱 처참한 불행이 있었다. 이만희, <<일본열도는 왜 후퇴하는가>>(2016)에서 이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조사해 밝힌 성과를 가져온다. “가족 중 걸을 수 없는 2-3세 이하의 유아들은 그곳에 남겨둔 채, 걸을 수 있는 아이들만 데리고 귀국했다.” 남은 아이들이 잔류고아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걸을 수 없는 유아를 업고 탈출할 마음이 없었던가, 시간이 없었던가?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한다. 마음이 있었다면, 걸음이 더뎌 잡혀 죽더라고 아이를 업고 탈출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부모를 얼마나 원망하고 그리워했겠는가? 일본인에게 시달리던 중국인이, 버리고 간 일본인 아이들을 돌보고 길렀다. 그 덕분에, 중국말을 하고, 중국인처럼 살고, 중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두었다.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그러고 있을 때 중국과 국교를 재개한 일본이 자국민을 찾아 데려가기로 했다. 2015년 3월까지 귀국한 잔류고아는 3,921명으로 집계되었다. 귀국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버리고 떠난 부모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만난 경우에는 무어라고 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따뜻하게 맞아준다고 해도,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함께 간 가족은 견디기 더 어려워 돌아가려고 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했으나, 일부 지방법원에서만 승소했다. 

269명은 신원이 확인되어도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잘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찾아내지 못해 알 수 없는 잔류고아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받을 차별이 중국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1983년에 한국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을 할 때 일본인이라고 여기는 가족의 상봉도 있었다. 1945년 이후에 쫓겨 다니다가 부모가 사망하고, 어린 자식 셋은 흩어졌다. 아들 둘은 각기 머슴살이를 했다. 딸은 외숙모를 찾아갔다가, 학대를 이기지 못해 가출했다. 이산가족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모여들어 서로 알아보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삼남매는 서로 일본 이름으로 불렀다. 여동생은 노부코(信子), 둘째 오빠는 이사무(勇), 큰오빠는 요시(芳)라고 했다. 이것이 일본인인 증거였다. 그러면서 외삼촌이 한국군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국인이고, 아버지만 일본인인 것 같다. 일본이든 한국인이든 이산가족이 된 처지는 같다. 양쪽 이산가족이 겹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 덕분에 많은 가족이 상봉했다. 첫 방송이 나간 6월 30일 밤부터 7월 12일까지 접수한 이산가족 신청서는 100,952건이나 되었다. 11월 14일 새벽 4시에 방송을 종료하기까지 10,957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감동이 특히 큰 장면을 신문 보도에서 가져온다.

 

아버지는 30여년 전 헤어진, 이제는 중년이 된 딸을 부여안고 “네가 내 딸이구나” 울부짖다 졸도했다. 성도 모르고 얼굴도 까마득한 여동생의 왼쪽 어깨에 붉은 점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오빠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허씨 남매는 전쟁으로 고아였다. 오빠 허현철은 고아원에 갔다. 동생 허현옥은 이발소 집에 입양되어 '김정애'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나중에 오빠가 그 이발소를 찾아갔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했었다. 소식이 끊어져 몇십 년 동안 헤어져 살았다. 허현옥은 자기 본명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래서 오빠가 “넌 김가가 아니야, 허가란 말이야! 알아야지 이름은! 개도 자기 이름은 아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았어...” 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강학기 할머니는 이빨이 많이 빠질 정도의 고령인데도, 침착하게 아들의 이름, 아들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의 이름을 물어보며 확인하는 장면 이 인상적이다. 아들 오순호 씨도 혹시나 혹시나 하여 서울 스튜디오에 같이 나와 있는 여동생의 곰보자국 기억을 떠올리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30여 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임을 확신한 할머니가 "네가 우리 아들이구나"를 외치며 딸인 점순씨와 함께 끝내 오열하는 장면은 눈물이 절로 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준다. 아들인 오순호씨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서로를 확인하고는 안도감과 형용치 못할 감정에 휩싸였는지 온몸에 힘이 풀려 숨이 가빠지고 옆사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댈 정도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오순호씨와 함께 나온 아내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함께 오열했다.

동생은 전쟁통에 영등포의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갔는데 1년도 안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결국 이날 형과 상봉하기 전까지 혼자서 외롭게 살아 왔다. 양자로 가기 전에 왼쪽 옆구리가 데인 적이 있는데, 이 흔적이 쭉 남아 있어서 서로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형과 만나기 얼마 전에 양어머니를 먼저 만났는데, '김광옥'은 양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고 '임돌이'가 본명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이 방송 때문에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도 상봉해야 한다는 요구가 드높아졌다.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1985년부터 2018년까지 총 21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상봉을 통해 각각 20,761명과 3,748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생사를 확인하고 상봉을 신청한 사람은 13,3675명이다. 이산가족 총수는 1천만으로 추정된다. 상봉 장면 보도 몇을 가져온다.

 

강원도 철원 인근 북쪽 산골 마을에서 자란 정학순 할머니(81)는 6ㆍ25전쟁 때 부모님과 피난길에 오르면서 오빠와 헤어지게 됐다. 부지런하고 웃음이 많던 오빠는 당시 16살로, 마을 청년들 소집에 따라나섰다가 이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이날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정 할머니는 “오빠가 전쟁에 소집된 사이 가족이 피난길에 오르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오빠가 혼자 텅 빈 집으로 돌아갔을 모습을 상상하면 항상 가슴이 먹먹하다”며 “이제 오빠는 세상에 없지만 오빠의 흔적을 기억하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이번 상봉은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정 할머니는 오빠의 아내(74)와 아들(45)을 만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올해 92세가 된 이금섬 할머니 역시 피난길에서 남편, 아들과 헤어져 생이별을 견뎌왔다. 이 할머니는 아들 이상철(71)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오자마자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들도 어머니와 함께 울다가, 문득 한 장의 사진을 건네며 “아버지 모습입니다, 어머니”라고 말하고 다시 오열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텔레비전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이산가족들은 눈시울만 적셔야 했다. 박찬종 할아버지(82ㆍ수원)는 ‘이산가족’ 네 글자를 듣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함경남도 장진군에 살았던 박 할아버지는 1952년 8월 그믐날 캄캄한 어둠을 뚫고 아버지를 따라 걷던 중 아버지가 낯선 이에게 자신을 맡겨 그대로 혼자 남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산가족은 고령화되면서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산가족 2세는 부모 세대가 실향민이라는 인식 정도만 있을 뿐이고, 상봉을 적극적으로 바라지 않는다. 얼마 지나면 이산가족 문제가 없어질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을 이탈하고 남한으로 오는 탈북민이 늘어나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기고 있다. 남북의 주민이 왕래는 물론 통신도 할 수 없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더 없는 고난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처참한 수난이다. 

남북이 나누어져 있어도 말은 통한다. 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 통하니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경과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이 점점 달라지는 것은 걱정이지만, 이산가족이 사라진다. 이산가족이 사라지면 분단의 직접적 고통도 사라진다. 분단의 직접적 고통이 사라져 불행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통일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더 큰 불행이 생길 수 있다. 

일본 이산가족이 귀국해 버리고 떠난 부모를 만난 경우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은폐해야 할 비밀이고, 망각해야 할 상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 이산가족 부모와 자식 상봉은 현장에서 공지하는 방송을 해서, 누구나 다 보고 함께 울었다. 상봉이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워 온 세계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지나친 은폐와 과도한 공지, 이 둘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특성 차이를 잘 나타내준다고 하고 말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부모가 가해자이고 자식은 피해자인,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막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지나친 은폐를 한다. 한국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피해자가 되어 이산의 고통을 처참하게 겪은 실상을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공지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가해자에 대한 무언의 분노를 격렬하게 나타낸다.

시간이 경과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 이산가족의 귀국 문제는 어떻게 되든 일단 해결되고, 더 이어지지 않는다.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아도 된다. 한국 이산가족의 상봉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다시 생겨난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생각이 있으면 누구나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일본의 즐거움을 부러워할 것은 아니다. 한국의 괴로움은 안이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베풀고, 깊고 넓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채찍이고 스승이다. 헤어진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절실하게 체험해야,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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