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영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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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영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4.01.1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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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최근 <곰은 없다 خرس نیست>라는 이란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이란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해 온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2022년작 영화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노 베어스>라는 이름으로 상영하고 있다. 영어로 번역한 제목을 한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이 제목은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곰은 없다”고 이야기한 데서 유래하는데, 이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 개봉판에서는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처음부터 <곰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개봉했더라면 영화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한국어 사용자들이 더욱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란어 사용자들이 “خرس نیست”라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을 한국어 사용자들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번역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예전에 개봉된 영화들 중에도 제목에 비슷한 문제가 있는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2023년에 나온 독일 영화 <붉은 하늘 Roter Himmel>은 한국에 <어파이어 Afire>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한국 개봉판에서는 원제목이 아니라 영어판에만 새로 만들어 붙인 제목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중역이나 다름없다. 반면 다른 언어권에서는 독일어 원제목을 각 언어로 번역한 제목을 내걸고 영화를 상영하거나 소개했다. 위키백과(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 영화를 프랑스어권에서는 “Le ciel rouge”로, 스페인어권에서는 “El cielo rojo”로 부른다고 한다. 이탈리아어 제목은 ‘불타는 하늘’로 번역되는 “Il cielo brucia”인데, 의역이기는 하지만 ‘붉은 하늘’과 뜻이 서로 통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어, 포르투갈어 위키백과에는 “Roter Himmel”이라는 독일어 원제목이 표제어로 올라와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는 ‘붉은 하늘’에 한국어를 쓰는 관객이 주목하게 하려면 한국 개봉판의 제목 역시 원제목을 직역한 <붉은 하늘>로 했어야 한다.

역시 독일에서 2021년에 제작한 영화 <Ich bin dein Mensch>의 한국 개봉판 제목은 <아임 유어 맨>이었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여러 나라에 영어 제목 <I’m Your Man> 으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붉은 하늘>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Mensch’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Mensch’, ‘사람’, ‘man’ 사이의 미묘한 의미 차이를 고려한다면 한국에서는 <당신의 사람>이라고 번역해서 개봉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16년에 나온 독일 영화 <토니 에르트만 Toni Erdmann>은 그 이듬해 한국에서 <토니 에드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독일어 이름인 ‘Erdmann’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표기하지 않은 것이다. ‘트’라고 써야 할 것을 ‘드’로 쓴 것은 영어식 발음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발음 표기를 잘못 하는 사례는 제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웹사이트에서는 독일의 유명 영화배우 파울라 베어(Paula Beer)를 ‘폴라 비어’라고 표기하는 잘못을 좀처럼 바로잡지 않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심지어 제바스티안 코흐(Sebastian Koch)를 ‘세바스티안 코치’라고 표기하기까지 했다.

극장가에서 이러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영화 수입사에서 원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오직 영어로 된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해당 언어 전문가가 아예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독일어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이란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 전문가들도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원어 제목을 도외시한 채 영어 제목만을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한술 더 떠서 배우 이름마저 제대로 표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영화계 종사자들의 직무유기다. 그리고 이 직무유기의 폐해는 한국의 관객들과 영화 애호가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 축적되면 그만큼 나중에 바로잡기도 어려워진다. 영화계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를 하루빨리 시정해 주기를 바란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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