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심사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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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심사의 괴로움
  •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 승인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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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칼럼]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다 고”(일체개고)라고 하는데, 고는 ‘두카’를 번역한 말이고, 우리는 이를 다시 괴로움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괴로움은 통상 즐거움과 대비되는데 정작 두카는 즐거움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개고’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어떤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겪는다는 것이 수동이라면 능동도 있는 것이니, 모든 존재는 수동적이면서 또한 능동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겪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데, 그런데도 일체개고라고 하는 건 일면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일체개고는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일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즉, 어떤 일도 겪지 않는 삶을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번뇌를 낳는다는 것, 그것이 일체개고일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때로는 논문 투고자이고 때로는 논문 심사자가 되기도 한다. 올챙이에게는 개구리 시절이 없으니, 대학의 교수들은 올챙이와 개구리를 번갈아 사는 분열된 자아가 되기 쉬운 직업이다. 내가 준 상처는 상처받은 그의 몸에 남아 있지만 내가 받은 상처는 내 몸에 남아 있는 법이니, 교수들은 자칫하면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 되기 십상이다. 이들은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씨아 혁명이요, 남이 하면 불란서 혁명”이라고 하기 쉬운 운명인 것이다.

학계는 연구자들이 생산하는 논문들로 유지된다. 이 논문을 세 명만 읽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겉보기와 달리 이는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논문은 전문적인 학술적 글이고, 그것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전문 학자를 상대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와 세 명의 심사위원이 제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그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이 세 명은 제대로 읽을까?

논문에는 논문의 저자가 속한 전문가 집단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 학술 연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심사위원이 그 논문을 심사한다면? 물론 국외자의 역할도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이는 일반론이고, 논문 심사의 영역에서는 들어와서는 안 될 일이다. 논문의 저자는 자신이 속한 영역의 연구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연구 지형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다.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논문에 들어가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연구 과정에서는 당연히 그 지형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나, (그런 일도 하지 않고서 어찌 무려 논문을 쓰겠는가?) 그것을 반드시 논문에 써야 하는가? 논문이 다루는 주제에 관한 선행 연구가 아예 없을 수도 있고, 언급할 만한 선행 연구가 없을 수도 있고, 논문을 읽을 사람이라면 당연히 안다고 보고 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문 심사의 기계적인 틀에 따라 선행 연구에 대한 비판이 없다고 게재 불가를 내린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논문 심사는 학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다. 학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통상 3인의 심사위원들이,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각자 미리 마련된 심사 항목에 맞춰 심사하고, 그 결과를 합산하여,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이러한 절차는 당연히 논문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절차 자체가 논문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큰 난관이 학계의 협소함이다. 연구자 풀이 매우 좁고, 한두 다리만 건너면 익명성이 무력화된다. 심지어 정실주의가 지배하는 패거리 의식이 끼어들 수도 있다. 심사위원의 학문적 권위와 심사의 엄밀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시스템은 무너진다. 논문이 다루는 주제의 연구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새로운 것, 파격적인 주장을 인정하기 쉽지 않고, 그 역사를 잘 모르는 자들은 논문에서 제안된 주장의 가치를 알아채기 어렵다. 그런데 논문을 보고 논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논문을 심사한다면? 중견 학자가 투고한 논문을 생초짜가 투고한 논문인 양 심사하는 심사위원은 또 없을까? 온갖 흉흉한 말들이 학계에 떠돈다.

말을 배울 때 욕부터 배우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는 쉽다고 하지만, 논문 심사에서 혹평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심사평은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는 투고자가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문 투고자가 자신의 논문이 학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듯이, 심사자 역시 그와 동일하게 아니, 그보다 더 엄격하게 자신의 심사평이 정당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생각이 학술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정실에 이끌려 심사 위원직을 수락하는 순간 지옥도가 펼쳐진다. 가뜩이나 좁은 학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인격적 모멸감과 학계에 대한 환멸감으로 연구자들이 학계를 떠나는 데 일조할 수도 있다.

논문 심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떠나라!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 개혁, 특히 비정규교수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정규교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사소통과 일치」, 「해명·치료·언어투쟁」, 「비트겐슈타인 삶의 방식의 변경」, 「대학 구조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벼랑 끝 비정규교수」,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고용구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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