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탈냉전을 관통하는 동아시아 질곡의 구조의 전체상을 개념화하고 대안의 동아시아를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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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탈냉전을 관통하는 동아시아 질곡의 구조의 전체상을 개념화하고 대안의 동아시아를 탐색한다
  • 이삼성 한림대·정치학
  • 승인 2024.01.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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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이삼성 지음, 한길사, 912쪽, 2023.11)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조적 틀과 그것이 역동적으로 진화해온 양상에 대한 독자적인 설명의 틀을 담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저자가 이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과 본질이 무엇이냐를 집요하게 질문하며 사유해온 결과물이다. 기존의 다른 개념적 틀이라 할 수 있는 냉전·탈냉전의 이분법, 혹은 북방삼각·남방삼각론, 혹은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 등의 개념틀로는 포착하거나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는 이 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더 포괄적이면서 깊은 개념화를 향해 노력해온 지적 오디세이다.

2009년에 출간한 저자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제1권이 ‘전통시대 동아시아 2천 년과 한반도’의 관계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개념화를 시도하였고, 제2권이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 조선의 역사인식과 시대구분’을 통해서 역시 이 지역 근대의 전체상을 재개념화하려 했다면, 이번에 출간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20세기 중엽 이후의 현대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저자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2000년대 초였다. 때는 바야흐로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 자본주의 세계경제 안에서 서방과 경제적 상호의존을 본격화하고 있었고, 미국은 2001년 벌어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며 이슬람세계를 향한 대테러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의 중국 견제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만큼, 미국과 중국이 함께 세계를 떠받치는 ‘차이메리카’라는 개념과 함께 각종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 시대의 지적 풍토에서 동아시아를 ‘대분단체제’라는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생뚱맞게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대분단체제라는 실체를 제주도 남쪽의 파랑도(波浪島)에 비유해 설명했다. 바람이 잔잔할 때는 보이지 않되, 파도가 심한 날에 형태를 드러내는 이어도라는 섬 말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에 가려져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파도 아래 거대한 실체로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의 실존적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자의 의도는 당시 꽃피고 있던 다양한 동아시아 공동체론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점증하는 경제적 상호의존에 기대는 기능주의적 논의에 머무는 가운데, 이어도 같은 긴장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고 당시 미일동맹이 주도하고 중국이 추격하는 양식의 21세기형 군비경쟁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의 질서를 향한 노력을 외면한다면, 머지않아 동아시아 평화에 엄중한 위기가 도래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동아시아의 긴장 구조는 파도가 잔잔한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이어도는 더 이상 파랑도가 아니게 되었다.

저자는 전후 세계의 처음부터 동아시아가 유럽에 대해서 가진 고유성을 주목했다. 전후 유럽과 동아시아 질서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유럽의 전후는 지역 내 열강들 사이 처절한 전쟁의 상처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두 개의 대립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들(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속에서 치유되는 질서였다. 반면에 전후 동아시아는 과거 제국체제하의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상처가 응결되고 확대 및 재생산되는 질서였다.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청일전쟁, 미국-필리핀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이라는 세 전쟁의 결과로 성립했다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그 제국체제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태평양전쟁, 중국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세 전쟁의 결과로 완성되었다. 

태평양전쟁은 저자가 ‘동아시아 제국체제’라고 명명한 전전의 동아시아 질서를 특징짓는 미국-일본의 제국주의 카르텔이 붕괴하면서 발발했지만, 그 전쟁의 결과는 한 차원 높은 미일연합을 낳는다. 중국 내전과 그 결과는 대륙의 지정학적 정체성을 전변시킨다.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의 신중국이 미국과 경제 및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우호적은 아니지만 전쟁은 하지 않는 공존 관계’를 모색한다. 하지만 그 열린 역사적 가능성은 미국이 1949년 10월 신중국 외교승인 거부를 공식 발표하면서 닫히고 만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원형’은 그렇게 구성되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중소동맹조약이 타결되는데, 바로 그 타결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의 한반도 전쟁 기획을 승인하는 시그널을 보낸다. 한국전쟁은 그 결과였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국은 즉각 개입했다. 미국이 마침내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압록강까지 올라가자 중국 또한 무력개입에 나서 미중이 한반도에서 격돌한다.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결과로 이미 같은 몸이 된 미국과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격돌하는 시기인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을 동시에 타결하면서 동맹을 공식화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대륙의 공산당 정권은 물론이고 타이완의 중국정부조차 초대하지 않은 가운데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 일본이 일방적으로 맺은 것이어서 사실상 ‘미일평화조약’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의 역사적 범죄의 직접 피해 당사자들인 동아시아 사회들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미국과 일본이 군사동맹 체결을 위해 서둘러 맺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더 이상 패전국도 전범국도 아닌 주요 동맹국이 되었기에, 이 조약은 일본의 이익을 고려한 미국 중심의 전략적 판단에 좌우되었다. 그 결과 이들 사회에 대한 전후 보상 문제뿐 아니라, 동중국해와 독도를 포함해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유산이 아닐 수 없는 많은 영토 문제들을 분쟁의 불씨로 남겨둔 채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직접 부딪치는 순간 미일연합과 중국이라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축관계가 성립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와 타이완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세 개의 소분단체체가 구체화 과정을 밟았다.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하는 순간 타이완해협을 동시에 봉쇄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프랑스가 벌이고 있던 식민주의 재건 전쟁을 미국이 본격 지원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며 물러나는 공백을 미국이 메꾸며 베트남의 소분단체제를 고착시키고 머지않아 1960년대 10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을 예비한다. 한반도에서는 김일성의 무력통일은 미국이 제지하였고,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중국이 막아 결국 한반도 소분단체제가 고착되었다. 그래서 미일동맹과 중국대륙이 대립하는 대분단의 기축과 세 곳의 소분단체제들이 동시에 굳어지면서 서로를 지탱하는 상호작용 시스템을 구성하고 만다.

그래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우선 중국대륙과 미일동맹의 대립을 가리키는 ‘대분단의 기축’과 복수의 ‘소분단체제’들로 이루어진 구조의 중층성을 주목한다. 이어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는 긴장의 다차원성 ―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그리고 역사심리적 긴장 ― 을 정의한다. 또한 그렇게 중층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성단위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성에 착목한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 질서가 내포한 고유성과 그것이 냉전-탈냉전의 이분법을 넘어 21세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연속성을 개념화한 것이다. 아울러 그 구조와 내용이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닫힌 질곡의 구조를 극복할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처음부터 유럽과 달리 미소관계가 결정적인 변수가 아니었고, 오히려 중미관계가 최종심급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지정학적 정체성을 결정한 것 역시 중소관계보다는 중국 사회 내면의 동학과 선택이었다. 저자가 대분단체제 기축관계로 정의하는 미일동맹과 중국대륙 사이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그리고 역사심리적 긴장은 탈냉전의 동아시아에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으로 치환되고 재충전된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소련과 달리 국력의 팽창을 가져온다. 지정학적 긴장은 이념의 함수가 아니라 국력의 함수다.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재충전된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도 재충전된다. 냉전기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긴장이었다. 중국 사회주의의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그 긴장은 약화하지만, 동아시아 주변 사회들의 민주화가 중국 톈안먼사태와 동시에 진행되면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긴장이 부상한다. 역사심리적 긴장도 재충전된다.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역사문제는 이념 담론에 눌려 동결된 채 내연하는 상태에 있었지만, 탈냉전으로 이념 담론이 퇴장하며 생긴 공백을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 담론이 대신한다. 이로 인한 역사심리적 긴장의 재충전은 단순히 중일 간의 문제가 아니다. 전범국가 일본을 ‘자유세계’라는 전후의 초국적 이념공동체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문명국으로 신분세탁을 시킴으로써 미국은 동아시아 역사문제를 ‘자기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일동맹 자체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 담론을 억압하고 중국을 위시한 공산사회들을 적대시하는 이념 담론을 특권화한 질서에 기반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동아시아 역사문제는 단순히 중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미일동맹 대 중국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더 나아가 2000년대 들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진화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제1국면에 속하는 21세기 첫 10년은 미일동맹이 한편으로 중국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통합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을 염두한 21세기형 군비경쟁을 주도하고 중국은 그에 대응하며 팽창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 결과 2010년을 전후해 진입하는 제2국면에서 미일동맹의 동아태 지역 해상패권은 위기에 직면하고, ‘아시아 재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미일동맹의 대중국 견제가 본격화한다. 중국에 대한 지정학적 봉쇄의 국면이다. 2010년대 후반에 시작되는 제3국면의 대분단체제에서는 미일동맹의 대중국 견제가 군사적인 지정학적 성격을 넘어 지경학적인 경제봉쇄 차원을 포괄하기에 이른다.

냉전기에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전 지구적 차원의 미소 냉전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면, 2010년대 이후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신냉전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전개되고 있다. 1990년 시점에서 중국의 경제력은 러시아연방에 미치지 못했지만, 2020년대에 들어 러시아의 경제력은 중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이 심화하는 국면에서 발발하고 지속되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동아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타이완해협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양상을 규명하고, 위기 극복의 지혜를 탐색한다. 또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문제의 구조적 성격을 해명하고, 그 궁극적인 해소의 방향을 제시한다. 아울러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리적 형상인 대분단선(大分斷線)에 자리한 타이완, 오키나와, 그리고 제주도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대분단체제론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고유성, 그리고 냉전·탈냉전의 시대를 관통하는 연속성을 개념화하고자 했다는 점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존 다워(John Dower) 같은 미국 학자들이 일찍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 대해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설명체계에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중국을 초대하지 않은 사실상의 ‘미일평화조약’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은 대분단체제 형성에 따른 결과였다. 이 조약체제의 핵심은 일본의 역사적 범죄의 최대 피해자인 중국 대륙의 정부를 조약 당사국에서 ‘배제’한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조약체제로 냉전기는 물론이고 탈냉전기까지 포괄해 동아시아 질서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국가 수준의 관계에서는 1970년대에 미국이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일본도 중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타이완의 장제스 정부와는 1952년 ‘중일평화조약’(中華民國與日本國間和平條約)을 맺은 바 있다. 1965년엔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강력한 촉구에 의해서 한일기본조약을 타결한다. 정부 차원에서의 한일 화해가 억지로나마 성립한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 대륙의 국교 정상화는 1972년 9월 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 때 마오쩌둥의 중국과 맺은 ‘국교 정상화 공동성명’에서 시작했다. 두 나라는 1978년 8월 12일 정식으로 평화조약(中日平和友好條約)을 체결한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냉전·탈냉전을 관통하는 동아시아 전체상을 개념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일관계에서도 한일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긴장과 역사문제는 결코 정부들 간의 조약들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이삼성 한림대·정치학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 예일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저작 부문, 2019), 한림대학교 학술상(2010), 백상출판문화상(저작 부문, 1999), 단재상(1998)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제국』,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2』,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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