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한 지방관의 재판기록, 『녹주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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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한 지방관의 재판기록, 『녹주공안』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4.01.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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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남정원과 『녹주공안』

        <『녹주공안』의 저자 남정원(藍鼎元)의 초상화>

조선시대, 혹은 중국 명청시대 지방사회의 동향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일은 필자를 비롯한 이 시기 역사가들의 오랜 소망 중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남긴 다양한 사료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데, 이때 지방관이 남긴 수사, 검시, 재판, 판결 기록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청나라 시기 한 지방관이 남긴 재판 관련 기록인 『녹주공안(鹿洲公案)』이 가치 있는 이유이다. 

『녹주공안』은 남정원(藍鼎元)이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재위 시기인 1727년부터 약 2년간 광동성(廣東省) 조주부(潮州府)에 속한 조양현(潮陽縣) 고을의 지현(知縣)으로 근무하면서 처리했던 민, 형사소송을 재판한 기록이다. 『녹주공안』의 ‘녹주’는 남정원의 호이고, ‘공안’은 관청의 사건 기록을 말한다. 복건성 사람으로 1680년에 태어나 1733년 사망한 남정원은 조양현 지현 근무 당시 명판결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수사 및 재판을 지휘한 남정원의 활약상과 함께 특정 사건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 지역사회의 비리와 현안 등 청대 조양현 지역의 사회경제사를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청대 지방관의 위계와 권한

『녹주공안』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청나라 지방 행정 구조와 지방관의 권한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청 왕조는 전국을 18개의 행정단위인 성(省)으로 나누었는데, 성 밑에는 부(府)·주(州)·현(縣)으로 구획하였다. 조선의 군(郡)·현(縣)처럼 가장 작은 행정구역이 주(州)와 현(縣)인데, 주와 현의 인구는 약 20만 정도였다. 주나 현이 일곱, 여덟 개 정도 모여 부(府)가 되었고, 다시 일곱에서 열세 개 정도의 부가 모여 하나의 성이 되었다. 또 성과 부 중간에 도(道)라는 감찰구(監察區)도 있었다. 

이들 각 행정구역에는 지주(知州)·지현(知縣), 지부(知府), 도대(道臺), 독무(督撫)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의 권한에는 상하질서가 반영되었다. 예컨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은 오직 황제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지방관은 자신의 직위에 맞는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그 이상의 처벌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급기관으로 사건을 의뢰해야 했다.

 

                           <19세기 말 광서(光緖) 연간의 조양현 모습. 『조양현지(潮陽縣志)』 수록>

『녹주공안』의 재판관 남정원의 경우 제일 말단 지방관인 지현(知縣)이었으므로 그가 스스로 재판해서 집행할 수 있는 형벌의 한도는 장형(杖刑) 100대까지였다. 그 이상은 부(府)로 보내고, 더 무거우면 성(省)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현의 권한을 무시하면 곤란하다. 당시 지현은 관할 고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한 일차적인 처리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때론 상관의 묵인 속에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형벌을 행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省)에서 재판을 하게 되면 증인들까지 자기 비용으로 출두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래서 죄인의 죄상이 명백한 경우에는 굳이 성으로 가서 재판받는 대신 장형의 매질을 매우 강하게 집행하여 죄수를 죽게 하는 ‘장폐(杖斃)’, 감옥에서 죽이는 ‘옥폐(獄斃)’, 식사를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수폐(瘦斃)’와 같은 방식으로 현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묵인되었다. 이는 비단 청 왕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조선 왕조의 지방 군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청대 현(縣)에서의 재판 광경. 청말 『점석재화보』 수록>

『녹주공안』에 등장하는 민생을 좀먹는 존재들

『녹주공안』에는 남정원이 처리한 모두 24건의 사건들이 등장하는데, 조양현 지방의 지역 사정과 사람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난다. 사건은 내용은 매우 다양했다. 세금 체납 문제, 사이비 종교집단의 폐해, 강도와 집단 패싸움, 악독한 서리들의 비리, 인신매매, 무고 사건, 소송을 부추기는 악질배의 소행, 토호의 횡포, 조직적인 해적집단에 관한 이야기 등등.

          <광동(廣東)의 부유한 풍림사(楓林寺)가 강도를 만나 약탈당하는 장면. 청말 『점석재화보』 수록>

이들 사건 가운데는 당시 백성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무리로 서리(胥吏)와 송사(訟師)가 자주 등장한다. 조양현의 서리들은 조선왕조의 지방 아전들처럼 고을의 권력을 농단하고, 각종 비리를 자행함으로써 민생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행정의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식 급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으로 수입을 축적하기 일쑤였는데, 조양현에서는 세금 징수 과정 중 뇌물을 받고 체납을 눈감아 주다가 지현 남정원이 그들의 불법 수입원을 차단하자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녹주공안』에는 뇌물을 받고 호적을 고쳐주거나, 마음대로 사적인 린치를 가해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고는 범행을 은폐하려 한 못된 서리들이 등장한다.

당시 소송문서를 대필하고 소송을 대행했던 송사(訟師)들의 불법행위도 도를 넘었다. 송사는 지금의 변호사와 같은 긍정적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소송을 부추겨 돈벌이를 하거나 없는 사건을 만들어 상대를 괴롭히는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조양현에는 흉악한 송사 진흥태라는 자가 악명을 떨쳤는데, 그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있지도 않은 사건의 소장을 써서 관아에 제출하여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집을 해적두목이라고 하거나, 강도질과 약탈을 했다느니 하면서 고소하였다. 관아에서는 그 말을 믿고 피고를 체포해서 옥에 가둔 후 시간이 한참 지나도 대질 신문을 할 원고가 없는 바람에 석방하거나 소송을 기각하는데, 그때는 이미 피고가 집 재산을 다 날려 버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추위와 굶주림, 화상으로 죽은 거지를 타살된 주검으로 거짓말을 해서 엉뚱한 살인범을 만들어 소장을 제출했다가 남정원에게 들통나기까지 했다.


사건으로 본 청대 민중들의 생활상

사이비 종교가 혹세무민하는 일도 사회 문제의 하나였다.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이 귀신을 숭상하고 신과 부처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신흥종교 후천교(後天敎) 교주가 이를 이용하였다. 후천교에서는 영험한 부적으로 병을 낫게 한다거나, 후사를 보게 해준다거나, 과부에게 죽은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는 등의 황당한 말을 퍼뜨리면서 금전을 탈취하고 여성을 폭행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조양현의 성밖 서쪽 교외에서 성벽을 따라 늘어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풀숲에 오래전부터 버려진 주인 없는 두 개의 관이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관들이 신격화되어 남녀노소 소원을 빌기 위해 참배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녹주공안』에서는 이를 빌미로 두 명의 노파가 점집을 열어 수입을 잡는 바람에 그 주변은 온갖 인간들이 몰려들어 소매치기, 성범죄와 같은 온갖 소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못된 중이 무고한 생명을 해친 사건. 청말 『점석재화보』 수록>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벌이는 악독한 짓은 한이 없는 것 같다. 조양현에서는 자신의 딸을 딴 사람에게 팔아버리고는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도 발생했다. 출가한 지 3년이 지난 딸을 친정 부모가 돈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팔아버린 다음 파렴치하게도 딸이 사라졌다면서 안사돈을 관아에 무고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고소장에서 안사돈이 딸을 때려죽인 후 시신을 숨겼거나, 돈을 받고 딸을 다른 집에 넘겼을지도 모른다고 뻔뻔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관 남정원의 재판기록인 『녹주공안』에는 청대 지방 세태와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여과 없이 담겨 있다. 그럼 조선 왕조는 어떠했을까? 중국과 조선은 문화와 풍속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녹주공안』의 사건들과는 분명 다른 일들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조양현에서처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악독한 인간이 등장하고 사람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필자는 조선왕조 지방사 자료를 뒤져보고 있다.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여 조만간 그 결과를 학계에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를 희망한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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