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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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1.13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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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24강_ 김재희 을지대 교수의 「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24강 김재희 교수(을지대 교양학부)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


김재희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각광”을 받다가 “엔데믹과 더불어 개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듯하더니 생성 AI의 시너지 효과로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메타버스(metaverse)를 두고 2022년 3월의 「미국 내 메타버스 산업 현황과 전망」 리포트를 빌려 메타버스를 구현하기까지 필요한 총 5단계의 작업” 중 “현재는 그 1단계로서 ‘메타버스 관련 인프라를 축적하고 사용성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는 단계’에 불과”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메타버스의 실재성은 기술적 몰입감보다 사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고 확산해가느냐에 따라서, 또 현실 세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치들을 얼마나 생성하느냐에 따라서, 강화”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처럼 비즈니스적 측면에 한정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으로 “메타버스는 ‘자아 동일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술철학자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를 원용해 “나의 동일성 문제”가 이제는 “존재론적 차원이나 실존론적 차원이 아닌 기술적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에 대해, 물론 잠정적이겠으나, 하나의 답으로서 “메타버스의 등장과 더불어 강화된, 기술적 대상들과 결합하여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는, ‘나’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더는 ‘인격적 동일성을 갖춘 불가분한 개체(personal individual)’로서가 아니라 ‘데이터 집합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정보적 가분체(informational dividual)’로서 구성”됨을 함축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11월 18일, 김재희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2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메타버스, 너무 이른 화려한 등장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사실상 장차 도래할 메타버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가깝다. 2007년 미국 미래학협회(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 ASF)는 인터넷의 미래를 연구한 메타버스로드맵(Metaverse Roadmap: MVR) 프로젝트에서 메타버스를 “가상으로 강화된 물리적 현실(virtually enhanced physical reality)”과 “물리적으로 지속하는 가상 공간(physically persistent virtual space)”이 융‧복합된 공간으로 처음 정의하였다.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VR),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AR), 거울 세계(Mirror World), 라이프로깅(Lifelogging) 등 각기 다른 경로로 발전해온 디지털 기술들의 총합체로서 메타버스를 포스트-인터넷의 대안으로 제안한 것이다. 

“현실과 가상이 상호작용을 통해 공진화하고 새로운 산업, 사회,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세상”, “오프라인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활동이 가능한 온라인 가상 세계”, “현실과 가상이 융합된 공간으로 나를 대리하는 아바타 또는 디지털 실사를 통해 인간의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는 세계” 등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와 같은 수준의 또 다른 세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2022년 3월 「미국 내 메타버스 산업 현황과 전망」 리포트에 따르면, 메타버스를 구현하기까지 총 5단계의 작업이 필요하고, 현재는 그 1단계로서 “메타버스 관련 인프라를 축적하고 사용성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메타버스는 여전히 생성 중에 있으며,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활동이 가능한 온라인 가상 세계가 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현실 세계의 활동을 가상 세계로 단순 연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제약으로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실험, 창작, 훈련, 실습, 학습 등이 가능한 곳으로 메타버스의 활용을 모색하는 기획들도 개발 중이다. 메타버스는 코로나19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간 가짜 현실이 아니라, 현실 세계가 제공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새로운 디지털 현실이 될 수 있다.

적어도 메타버스의 개념적 정의들이 지향하는 디지털 가상 세계는, 아바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실 세계에서는 구현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어지는 세계이다. 게임 공간이 미리 짜인 이야기대로 역할극을 하는 무대라면, 메타버스는 아바타들이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가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버스는 유아론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공간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확장된 현실(XR: eXtended Reality)’이다. 메타버스의 실재성은 기술적 몰입감보다 사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고 확산해가느냐에 따라서, 또 현실 세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치들을 얼마나 생성하느냐에 따라서, 강화되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자아 동일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메타버스 안에서 나는 아바타로 거주한다. 아바타는 현실 세계의 나를 대신해서 메타버스에서 활동하는 디지털 캐릭터다. 메타버스의 아바타는 ‘자아 동일성(self-identity 또는 personal identity)’에 관한 오래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자아 동일성은 나라는 개체를 다른 것들과 구별해주며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와 전혀 다른 성별, 체형, 인종, 나이, 직업의 아바타 모습으로 메타버스에서 활동할 때, 나는 과연 현실 세계의 나와 동일한 나인가?

전통적으로 나의 동일성은 기억의 연속성에 의해 보장받았다. 그러나 기억은 심리-생명적 수준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삶에 주의하는 의식’은 기술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 또 그 안에서 형성된다. 기술철학자 스티글레르(B. Stiegler)에 따르면, 기억은 세 차원을 갖는다. 1차 기억이 ‘유전적 또는 종적 기억(genetic or specific memory)’으로서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방식으로 행위하게 하는 기억이라면, 2차 기억은 ‘후성 발생적 또는 신경적 기억(epigenetic or nervous memory)’으로서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들이 갖는 과거 경험들에 대한 기억, 후천적 학습을 통해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기억이다. 3차 기억은 ‘후성 계통 발생적 또는 기술-논리적 기억(epiphylogenetic or techno-logical memory)’으로서 기술적 대상의 형태로 외재화된 기억이다. 인간화(hominization)는 이 3차 기억의 형성과 더불어 진행된다. 

기술적 기억은 문자, 아날로그, 디지털 등의 형태로 변화하며 우리의 주의력, 인지, 지성, 삶의 방식 등을 규제해왔다.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요령, 생활 기술, 인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 모두는 ‘주의의 양식(attentional forms)’에 속한다. 이 주의의 양식은 집단적 경험을 배우면서 세대들의 축적된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교육을 통해서 정교해진다. 문화란 개별 경험이 집단화되는 과정에서 발명된 ‘주의 양식들의 세대 간 전송’이며, 이런 주의 양식들, 지식의 유형들, 자신과 타자에 관한 관심과 돌봄 체계의 상이한 유형들이 문화적 특수성을 지닌 다양한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주의(attention)는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헤드셋 등 디지털 기술 환경의 강력한 영향, 즉 기술적 비의식(technological nonconscious)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요컨대, 심리-생물학적 개체로서 나의 동일성은 3차 기억인 디지털 기술 환경 안에서 구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동일성 문제는 이제 존재론적 차원이나 실존론적 차원이 아닌 기술적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메타버스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키는가? 디지털 가상 세계의 나는 현실 세계의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 불연속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나의 동일성을 잡아주는 것은 몸이다. 디지털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가 탈신체성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가상의 두 세계를 묶는 안정적인 고정점으로서 몸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 몸은 영혼/정신/생명과 대립하는 기계적 신체가 아니다. 기술-문화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살아 있는 몸이다. 기술적 환경과 결합된 몸으로 체화된 기억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며 나의 동일성을 보장한다.

메타버스는 시청각적 지각에 작용하는 화려하고 실감 나는 VR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험자의 몸에 장착된 인터페이스 기기를 통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embodied, extended and distributed self)’를 구성한다. 메타버스에 들어가는 현실의 몸은 아바타가 되면서 코드화된 몸이 된다. 디지털 정보로 육화된 몸, 디지털 이미지로 확장된 몸은 가상과 현실이 혼합된 ‘확장 현실(XR)’ 속에 거주한다. 컨트롤러를 조작하는 물리-생물학적 손동작과 디지털 이미지들의 시청각적 체험을 융합한 몸 도식으로 두 세계의 경험을 나는 ‘체화’한다.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고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 몸의 감각 운동적 상태는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가상에 동시에 거주하며 나의 의식을 현실 세계에서 가상 세계로 ‘확장’시킨다. 나의 의식적 주의는 물리적 신체의 행위와 가상 신체의 행위에 ‘분산’되어 양자의 불일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요컨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인지적 정서적 상호 영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합하는 자아, 즉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를 산출한다.

 

인격적 개체(Personal Individual)에서 정보적 가분체(Informational Dividual)로

메타버스 아바타는 불변의 자아나 고정된 정체성이란 없다는 다중 정체성(Multi-identity) 실현에 그치지 않는다. 메타버스의 등장과 더불어 강화된, 기술적 대상들과 결합하여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는, ‘나’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더 이상 ‘인격적 동일성을 갖춘 불가분한 개체’로서가 아니라 ‘데이터 집합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정보적 가분체’로서 구성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생명적-심리적 개체에 연합된 환경은 단순히 외부 세계가 아니라, 체화되고 착근된 삶의 존재 조건이자 잠재적인 바탕이다. 디지털 기술과 메타버스에 의해 현실과 가상이 융합된 확장 현실이 우리의 연합 환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인간을 특권화한 인간 중심주의 패러다임의 몰락,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협력 네트워크 세상이 도래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기억 기술은 언어 영역을 넘어서 소리, 몸짓, 행위 등을 데이터와 디지털 코드 형태로 프로그래밍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 및 세계와 타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 방식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가분체는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 자동화된 디지털 기억 장치들에 주의가 포획되어 심리적-집단적 개체성을 상실한 채 시장의 이익에 복무하는 데이터 꾸러미다. 나의 경험들은 의식적 주의의 노력으로 묶이지 않고 흩어져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 덩어리로 남는다.

확장 현실에 거주하는 정보적 가분체의 인지는 체외 기관화된 기술적 대상들로 확장되면서 동시에 분산된다. 확장된 지각과 분산된 인지는 나의 정체성을 심리-생물학적 개체성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은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들이다. 탈개체화된 가분체들은 현실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보다 반려 동물이나 AI 로봇과 함께 살며 각자의 디지털 환경과 가상 세계를 돌아다닌다. 메타버스를 떠도는 아바타들 역시 디지털 기술에 의해 구성된 데이터 집합체이다. 메타버스에서는 아바타로 코드화된 ‘나’들이 단편적인 정보와 관심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로서 이합집산한다.

 

메타버스의 존재 이유

메타버스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이질적 행위자들의 네트워크 효과다. 행위자란 스스로 행위를 하거나 타자에 의해 행위 능력이 부여된 존재를 의미하며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역시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과 연결된 네트워크 효과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오가는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다른 행위자들과 어떤 네트워크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역량이 달라질 수 있다.

메타버스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는 인간 아바타와 AI 아바타가 모두 동등한 아바타 행위자이다. 심지어 장차 메타버스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치게 될 아바타들은 인간보다 AI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메타버스를 구성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은 AI에 한정되지 않는다. 메타버스의 디지털 행위자들 배후에는 현실 세계의 기술적 행위자(CG, AI, VR/AR, HMD 등), 인간 행위자(사용자, 설계자, 제작자, 서버 유지 보수 노동자 등), 나아가 지구 행성 행위자(흙, 전기, 광물질, 물 등)까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온라인 가상 세계를 오프라인 현실 세계와 연결된 전체로서 조망하는 시선이 개체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왜 메타버스인가? 디지털 기술의 메타버스적 활용은 인류에게 과연 어떤 미래를 약속하고자 하는가? 문자로부터 디지털로 기억 기술이 발달하면서 문학적 상상력이 기술적 상상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인물과 스토리텔링으로 허구적 세계를 구축해보임으로써 현실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던 소설처럼, 메타버스 역시 디지털 이미지와 콘텐츠로 현실 세계와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세계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체화되고 확장되고 분산된 자아, 정보적 가분체로서 비인간과 네트워크된 자아는, 사유 무능력자의 궁핍한 삶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디지털 기술을 토대로 ‘삶에 주의하는 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면서 더 높은 자유도의 삶을 실현할 수도 있다.

메타버스는 파르마콘이다. 현실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가상 세계가 될 수도 있지만,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디지털 기술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불평등)를 강화하며 가상 자산을 사고파는 화려한 3D 시장에 머물 수도 있다. 메타버스는 지금 생성 중에 있다. 메타버스는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기술적 잠재성이 현실화된 상태이자 동시에 새로운 미래 현실을 창조할 잠재적 발판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제 유니버스와 메타버스가 공존하는 멀티버스 안에서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정보적 가분체로서 동등한 행위자들과 어떤 가치 지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메타버스와 자아 동일성 (김재희 을지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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