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사람들은 부를 과시하도록 진화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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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사람들은 부를 과시하도록 진화했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1.0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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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계급론: 제도 진화의 경제적 연구 |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 박종현 옮김 | 휴머니스트 | 496쪽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쓴 이 책은 1899년 출간 이래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하는 우화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많은 이가 이 책을 부유한 계급의 약탈적인 행태와 대기업의 횡포, 부와 소득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에 돋보기를 댄 ‘소비의 사회학’으로 읽었다. 하지만 베블런이 주목한 것은 인간이 어떤 경로로 특정한 제도를 형성하고 또 제도의 진화 속에서 자신들의 본성을 발현하거나 억제해왔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책의 부제가 ‘제도 진화의 경제적 연구’인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미국 사회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베블런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왜 유한계급처럼 약탈적이고 기생적인 계급이 출현하고, 많은 사람이 계급 격차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소비 행태인 과시적 소비를 모방하는지 역사적이고 진화론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계급론』을 미국 사회에 대한 우화나 ‘소비의 사회학’을 다룬 저작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베블런은 당대의 미국, 즉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에서 야만 문화로의 회귀를 읽었다.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해지면서 약탈적 사고 습관이 부활했고, 부족주의가 연대의식을 대체했으며, 모두에게 유용성을 제공하는 것보다 남들의 시샘을 불러일으키는 행태가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한계급론』은 야만 문화의 성행과 대기업의 횡포, 부와 소득의 양극화라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해보려는 경제학적 작업이었다.

“베블런이 경제학자로 성장한 시기는 근대 미국의 형성기였다. 북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중서부 목초지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으며, 산업화·기계화·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또한 자본주의적 기업의 법인적 형태가 본격화되고, 대량 소비를 자극하는 도구가 출현하는 등 미국의 제도적 인프라가 근본적인 변형을 겪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베블런에 따르면,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의 시기는 야만 문화로의 회귀 현상이 발생한 시대다.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해지면서 약탈적 사고 습관이 다시 등장했고, 부족주의가 연대의식을 대체했으며, 모두에게 일상의 유용성을 제공하려는 충동을 대신해 시샘을 유발하는 구별의 감각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1870년대부터 준약탈적 사업 습관을 선호하는 정서, 신분에 대한 강조, 전반적인 보수주의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1880년대에는 이러한 물결이 더욱 뚜렷하게 감지되었다. 베블런은 이러한 변화를 세기말에 출간된 『유한계급론』 속에 반영했다.”
- 〈옮긴이 해제〉, 457~458쪽

『유한계급론』은 보통 제목으로만 알려져있다. 하지만 원래 이 책에는 ‘제도 진화의 경제적 연구(An Economic Study in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문구는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요약한다. ‘제도 진화의 경제적 연구’는 인간의 경제 제도가 어떻게 출현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했는지 파악하는 것에 『유한계급론』의 목적이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베블런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왜 유한계급이 출현하고 과시적 소비가 나타나는지를 진화론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베블런에 따르면, 유한계급은 폭력과 기만으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 야만인이 산업사회에서 진화한 결과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약탈적인 본성에 따라 경쟁심과 호전성, 자기과시 본능을 발휘하는 유한계급의 대척점에는 인간의 집단 고려적이고 평화적인 본성에 따라 부모 성향, 장인 본능, 호기심 본능을 발휘하는 산업 계급이 있다.

베블런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 계급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기중심적·약탈적 본성과 집단 고려적·평화적 본성 모두 인간에게 내재해있고, 각각의 본성에 따른 여러 본능 중에서 장인 본능은 약탈적 본성과 평화적 본성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키워 내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평화로운 미개 시대를 상찬하고 폭력적인 야만 시대를 비난하는 것으로 분석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보다 미개 시대와 야만 시대, 수공업 시대를 거쳐 기계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소유권에 기반을 둔 유한계급 제도가 정착하며, 이 과정에서 금전적 제도로서의 ‘사업(business)’과 산업적 제도로서의 ‘산업(industry)’이 공존하고 갈수록 산업이 사업에 대해 우위를 행사하는 양상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유한계급을 비난하기 위해 끄집어낸 것으로 알려졌던 과시적 소비 및 여가의 성격과 이를 분석한 베블런의 진의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그저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세속적 욕망의 표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한계급이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의무이고 다른 계급이 사회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 따라야 하는 문화이자 규범인 것이다. 베블런이 거듭 강조하는 제도는 바로 이와 같은 문화, 규범, 관습의 총체이며, 이것이 진화하는 과정을 경제학적으로 밝히는 데 『유한계급론』의 존재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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