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예술혼을 지킨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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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예술혼을 지킨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1.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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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섭 평전: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 이원규 지음 | 한길사 | 568쪽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44)은 빼앗긴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라고 하늘이 점지해 내려보낸 듯한 비범한 인물이다. 39세의 나이에 요절하듯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집필한 그의 미학·미술사 연구 업적은 100년을 산 학자보다 크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이 최초이고 광복까지 단 둘뿐이었다. 고유섭은 서화는 물론 도자기, 불상, 불탑까지 우리의 미술사를 학술적 체계로 정리해냈다.

『고유섭 평전』은 고유섭의 학문, 인천·경성·개성 등에서의 생활을 두루 다룬다. 부친 고주연의 생애부터 그려지는 조선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통문관·열화당 전집과 그 당시 신문 및 『진단학보』 『조광』 『신동아』 『문장』 등에 실린 1차 자료를 충실하게 담았고, 어려운 한자어는 풀어서 설명했다. 1910~20년대 인천시가지 지도를 실어 그 당시 실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미공개 자료인 고유섭 가문의 호적, 족보와 부모 및 고유섭의 졸업장 등을 수록했다. 고유섭의 일기와, 가족과 선후배의 증언, 동국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 우현의 육필원고와 답사노트, 삽화 등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생애를 오롯이 복원했다. 그렇게 복원한 고유섭의 짧은 생애는 조선 민족은 열등하고 문화예술에 독창성이 없다고 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예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일관되어 있었다.

우현 고유섭은 1925년 보성고보를 이강국과 함께 공동수석으로 졸업했다. 조선인 차별로 44명밖에 입학하지 못하는 경성제대에 2회 입학생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1927년 23세가 된 고유섭은 예과과정을 마치고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한다. 조선에는 ‘미학’은 물론 ‘미술’이란 말도 없었다. 저자는 고유섭이 미개척 분야인 미학의 기초를 쌓고 조선미술사 연구를 개척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고유섭은 졸업 후 미학을 떠나 미술사 연구로 직행했다. 1933년 고유섭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했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 고유섭은 자기 학문을 쌓아가는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미술사에 대한 지식을 확장했고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해 다양한 연구자들과 학술모임을 하며 미술사학자로서 실증성을 중시하고 사회경제사학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35년 이후 박물관장 고유섭의 삶은 본격 연구의 중심으로 흘러갔다.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철저한 현장 답사를 하며 개성의 고적들을 소개했다. 또한 고려 화적, 조선의 전탑과 그림, 고려의 도자, 골동품, 고서화 등에 대한 글을 발표해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고유섭은 1,000년이 지난 고려 초의 철불 석가여래상을 총독부박물관에서 돌려받아 봉안식을 여는 큰 과업도 이뤘다.

학계에서는 고유섭이 남긴 연구성과 가운데 탑파 연구를 가장 크게 여긴다. 한국의 문화유산 중 탑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가장 우수한 특징이 있다. 고유섭은 탑이 생성된 삼국시대부터 1,000년의 변천 과정을 정확히 짚어 연구함으로써 빛나는 성과를 남겼다. 시대에 대한 고증과 탑파 양식을 철저하게 고찰해 일본 학자들과 다르게 시기를 비정했다. 고유섭은 최고 권위 일본인 연구자들을 넘어 우리나라 탑파 연구의 결정판을 써냈다.

고유섭은 여러 사전에 인물 열전을 쓰기도 했다. 일본 후잔바오가 펴낸 『국사사전』에는 안견, 안귀생, 윤두서의 열전을 써보냈고, 조광사가 간행한 『조선명인전』에는 김대성, 안견, 공민왕, 김홍도, 박한미, 강고내말, 고개지, 오도현 등의 열전을 썼다.

고유섭을 대표하는 글로 유명한 것은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이다. 그 성격은 상상력·구상력의 풍부함과 구수한 특질, 이렇게 두 가지를 짚는다. 순박한 데서 느끼는 구수한 큰 맛, 단순한 색채에서 오는 적조미를 ‘조선의 미’라고 규정한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은 새롭고 탁월한 안목이라며 동의했겠지만 후학들에겐 ‘야나기의 영향을 떨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야나기의 관점을 넘어서려고 쓴 글이었다.

우현 고유섭은 오늘날 보통명사가 된 ‘분청사기’의 명명자다. 「고려도자와 이조도자」에서 고유섭은 일본에서 유행한 미시마테의 제조법과 유래를 분석하고 청자의 타락물이자 변화물이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다인들이 유래도 모르고 붙인 미시마테라는 명칭보다는 ‘분장회청사기’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을 줄인 말이 분청사기다.

고유섭은 우리 민족이 조선의 미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중국을 모방하지 않고 창조적 변용으로 독창성을 획득했으며 일본보다 우수하다는 걸 알게 해서 땅에 떨어진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다. 조선의 문화예술은 독자적이지 않고 하찮은 것이라고 천대받아 모두가 열패감에 빠진 시절에 우현 고유섭은 짓밟힌 민족자존을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였다. 저자 이원규는 고유섭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민족의 문화예술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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