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찾고, 구하고, 모으고, 지켜내던 열정적인 ‘책 사냥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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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고, 구하고, 모으고, 지켜내던 열정적인 ‘책 사냥꾼’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1.0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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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사냥꾼의 도서관 | 앤드류 랭·오스틴 돕슨 지음 | 지여울 옮김 | 글항아리 | 272쪽

 

이 책은 책이라는 매체가 여전히 강력하고 독자적인 힘을 발휘하던 시대에 적힌 ‘책 이야기’다. 이 책의 주 저자인 앤드루 랭은 디브딘 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서문을 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어한다.” 뒤이어 랭이 펼쳐내는 각종 애서가의 일화를 보면 오랜 역사에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호메로스, 단테와 밀턴, 셰익스피어와 소포클레스 등 낯익은 이름들부터 리브리나 뒤몽스티에처럼 해당 분야에 깊이 관심을 품지 않으면 분명히 낯설 이름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책을 사랑하고 탐내던 이들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진다.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는 가끔 오싹하고 때론 우스꽝스러우며 종종 감명 깊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루소의 저작을 발견하고 밤새 잠 못 이루던 수집가는 책장 사이에서 루소가 보관한 페리윙클 꽃잎을 보고 “극한의 행복”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던 귀중한 기도서를 찾아내기 위해 500킬로미터를 한달음에 달려간 수집가도 있다. 어떤 책 도둑은 본인이 놓친 책을 포기하지 못하여 책 수집가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 다종다양한 애서가들이 끝내 바라던 풍경은 모두 같았다. 세상의 진귀한 책들을 한데 모아둔 자신만의 도서관이 그것이다.

랭은 책의 가치를 ‘아름다움’ ‘희귀함’ ‘기묘함’ 등 세부적인 항목으로 구분한다. 비록 문학적 관점에서는 별다른 가치가 없을 작품일지라도, 책 자체로는 유의미한 작품도 있다. 먼 과거에 제작되어 만든 이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라거나, 희귀한 삽화가 수록된 작품 등이 좋은 사례다. 마리 앙투아네트나 뒤바리 부인, 나폴레옹 등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소유한 책 역시 큰 관심을 받는다. 알두스 마누티우스처럼 전설적인 출판인이 펴낸 책에는 마니아들이 따라붙는다.

랭은 이러한 책 수집의 매력을 “감상적인 측면”으로 설명한다. “고서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문학적 유물로서 신성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이는 종교의 신자들이 종교적 유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책을 모으는 이들은 한때 작가가 미래를 전혀 예견치 못한 채 설레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출판한 바로 그 작품을 바란다. 작가가 제작에 직접 의견을 내고, 훗날 부끄럽게 여길 작품을 손수 다듬어 수록한 바로 그 책 말이다. 독자는 “이런 판본을 통해 작가의 영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다”고 느낀다. 책이란 여러 기록이 담긴 인쇄물을 넘어, 타인의 영혼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책을 읽기를 위한 도구로만 다루지 않는다. 책이란 오래될수록 귀하며, 희귀할수록 탐나는 대상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현대 한국에서도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1698년 암스테르담에서 펴낸 판본이 주는 감동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해당 판본 속 삽화에는 17세기 파리의 대중이 본 복장을 그대로 차려입은 등장인물의 모습이 수록되어 있으며, 독자는 이를 통해 먼 과거의 사람들과 연결됨을 느낀다. 이때 책은 ‘읽기’를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가 여실히 드러나는 흔적이 된다. 저자는 “우리가 책에 생생한 애정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이 감상적인 측면”에 있다고 설명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위대한 시인들,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다. 우리의 손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손을 마주 잡는다”. 우리는 마주 잡은 손에서 시와 소설을 발견하고, 기도나 노래를 마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책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책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본문에서는 이 과정을 무척 생생하게 묘사한다. 장서와 서가를 관리하는 법은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자신만의 책장을 가꾸거나 오래된 책을 고치는 요령 모두 현대에는 거의 배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책의 1장과 2장이 애서가와 책 수집가, 그리고 그들의 기록에 대해 두루 다룬다면 3장과 4장은 고서와 삽화 책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이 중 3장이 주목하는 고서는 ‘필사본’으로, 유물로서의 책 중에서도 그 가치가 가장 높이 평가된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라는 필사본의 특징은 많은 수집가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독자 중에서 필사본을 수집하는 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기에 필사본을 손에 쥐고자 온 힘을 다하는 수집가들의 노력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사소한 오자나 얼룩으로 다가옴직한 책의 오류조차 애서가들에게는 과거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필사된 성서에서 발견된“책을 끝냈으니,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구절은 그러므로 더욱 강렬한 반향을 준다. 오늘날 책은 더는 가장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귀족과 도둑을 막론하고 온갖 사람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책장 속 활자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와 작가를 연결하고 있다.

물론 활자만이 책 속의 연결 고리인 것은 아니다. 오스틴 돕슨이 쓴 4장 「삽화가 들어간 책」은 그림책이나 삽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선물과도 같은 장이다. 돕슨은 책이 쓰일 당시만 해도 신식 문화였던 ‘삽화’가 어떻게 책의 울림을 더하고 아름다움을 배가하는지 서술한다. 돕슨은 삽화라는 예술 분야가 어떤 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해왔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짚어내며, 이 과정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감각적 접근을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든다.

책이 융성하던 시절은 이미 떠나갔다. 다만 책은 여전히 쓰이고, 만들어지며, 읽히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과거의 책들은 다시 다채로운 글과 그림으로 살아나 현대의 독자에게 전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인쇄된 글과 그림을 통해 타인과 맞닿으며 다른 시공간을 체험한다. 때로는 책 안의 내용에만 감동하지만, 어떤 때에는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에 지극한 애정을 품는다. 이 책은 이 감동과 애정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는 책이다. 19세기 유럽을 살았던 애서가들의 삶을 정확히 공감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책을 향해 바치는’ 연가의 진실성에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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