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론으로 집대성한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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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론으로 집대성한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끝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1.01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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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 대서양 혁명에서 나폴레옹 집권까지 | 장 클레망 마르탱 지음 | 주명철 옮김 | 여문책 | 888쪽

 

저자는 영어권의 연구 성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문헌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1770년부터 1802년까지 시기를 네 가지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나눠서 재해석하자고 제안한다. 먼저 ‘위에서 시작된 혁명’은 루이 15세가 시작하고 루이 16세가 어설프게 이어받았으나 1789년의 ‘바스티유 정복’으로 알려진 대담한 정변으로 실패했다. 그때 프랑스인 거의 전체가 기다리던 혁명적 재생이 시작되었다. 그다음으로 1792년에 자코뱅파가 주도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자코뱅파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경쟁이 제도적 안정을 방해했고, 결국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이 국가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수많은 사건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는 근대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저자는 이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국내외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마치 장편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솜씨 좋게 다루었다.

저자 장 클레망 마르탱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 혁명사가인 알베르 소불의 계급사관을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일으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계층이 혁명의 산물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논증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물론 소불을 위시한 앞 세대 역사가들의 탁월한 연구 성과는 충분히 인정하고 계승하지만, 지나치게 중장기적 관점으로 혁명기를 재단하거나 특히 정치사상을 우위에 두는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한마디로 저자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역사 수정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혁명’은 프랑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명예혁명으로 유명한 영국을 비롯해 제네바, 폴란드, 스웨덴,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서양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 체제인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역사의 엄청난 분기점이자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1789~1799년을 휩쓴 프랑스의 사회변화만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대서양 혁명이 ‘부드러운’ 혁명이자 계몽주의 시대에 잇달아 일어나 국내 문제와 신분이나 시민 공동체의 긴장을 해결하는 ‘혁명들’에 속하고 대부분 실패한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1789년까지 일어난 이런 방식의 혁명들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난 ‘혁명’이었으며, 민중 세력이 사회지도층 세력만큼 중요했고 명사들의 지도체제를 설립하는 것과 다른 정치적 해법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많은 사람이 흔히 오해하는 사실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은 혁명은 새로운 것이고 구체제는 낡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의 위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혁명의 문턱을 넘었다는 집단의식은 분명히 1789년부터 생겼지만,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구조가 허약하고 결국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1789년에는 절대군주정의 질서 파괴보다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체제의 잔재에 붙인 이름이 관건이었다. 앙시앵레짐의 절대주의는 이미 1760~1770년부터 몰락하고 있던 건물을 가리는 벽면이었을 뿐이다”, “혁명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그렇게 해서 나라를 불행한 모험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의 ‘새로움’과 구체제의 ‘낡음’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정부가 세 가지 정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까 망설이던 순간이 바로 혁명사의 실마리였다. 조세제도가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세 가지 정책 가운데 첫째는 프랑스가 부채상환 방법을 토의할 수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남을 것인가, 둘째는 전문직이 참여하는 정부를 운영하면서 난폭할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절대주의 국가가 될 것인가, 셋째는 전통 귀족이 왕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는 ‘혼합형mixte’ 군주정이 될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일련의 상황들이 결합해서 생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혁명’의 뜻을 예단하지 않고 평가해야 하며, 당시 여론이 국내외적 상황과 함께 ‘혁명’을 어떤 맥락에 접목시켜 언급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인 것은 재생이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는 고질적인 재정적자와 세금문제, 종교 갈등, 극심한 빈부격차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 1789년 이전에 이미 혁명을 겪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 근거로 농촌과 도시에서 30여 년 동안 반란과 봉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꼽는다. “이념적으로 야릇한 지름길을 부추기는 요약에 의존하는” 전체사적 해석을 경계하면서 “역사를 쓸 때 그 어느 때보다 정치철학의 체계적 분석에 솔깃해져 굴복하는 일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미리 계획한 개혁이 아니라 타협과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왕국의 헌법을 요구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못한 상황이 진짜 혁명적인 목표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기를 종교전쟁기부터 온갖 갈등을 극복하면서 근대국가를 발명하고 절대군주정을 세우는 과정의 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결론짓는다.

200년도 훨씬 더 지난 과거의 역사적 대사건에 우리가 여전히 관심을 갖고 계속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의 지적 발전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써나가는 주체인 개인과 집단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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