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구상한 200여 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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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구상한 200여 년의 여정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1.0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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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연의 | 이근호·송치욱·김정철·김방울·임성수 지음 | 은행나무 | 248쪽

 

이 책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철학, 사학, 문학 등 관련 전문가를 초빙하여 꾸린 공동연구팀이 영남 지역의 유력한 유학자들이 200여 년간 집필하여 조선 시대 대표적인 경세서로 자리매김한 『홍범연의』를 다방면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홍범연의』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론을 집대성한 28권의 역작으로, 군주의 덕목과 통치, 토지·화폐 제도, 법률과 교육, 인륜과 제사 등 방대한 내용을 집대성한 귀중한 사료다.

17세기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존재(存齋) 이휘일과 갈암(葛庵) 이현일은 “나라가 큰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며, 동양 고대의 정치·경제·문화를 간결하게 정리한 고전인 『홍범』을 조선의 실정에 맞춰 새로 쓰기로 결심하고 『홍범연의』 편찬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바로 간행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 높은 원고를 집필해냈지만, 후학들에게 이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발전시켜 완성해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영남 지역의 유학자들은 그들의 뜻을 받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내용과 구성에 관해 치열하게 토론하여 1863년 『홍범연의』를 펴낸다. 『홍범연의』의 내용 중 이상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핵심은 성군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의 표준을 이야기한 「황극(皇極)」 편, 예치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제도를 정리한 「팔정(八政)」 편,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는 균분(均分)·항산(恒産) 제도와 화폐개혁론에 있다.

유교에서 제시하는 전통적인 이상사회는 대동사회(大同社會)로, 모든 재부(財富)를 전체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재부를 공유하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본문에 따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면 자신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대되므로, 개개인이 자연스럽게 사회의 이익을 위해 역량을 발휘한다고 본다. 개별 사회 구성원은 성별, 나이, 사회의 수요에 따라 알맞은 일을 부여받아 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통치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즉 전체 사회 구성원이 단결하고 사랑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면 행복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홍범연의』는 대동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들을 탐구한다. 먼저 「황극」은 의리와 시비를 중시하면서 이를 위해 군주의 자기 수양을 강조한 주자의 인식을 바탕으로 임금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서술한다. 임금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보여주는 존재이자 자기 수양의 표준이 되어야 하며, 통치 행위를 통해 자신의 덕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요한 무위의 마음 상태로 중정(中正)을 지켜 탕평한 도를 갖춰야 한다. 다만 통치 행위는 임금의 덕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바탕을 두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 「팔정(八政)」이다. 

예(禮)의 근간이 되는 제사와 백성을 교화하는 교학으로 예치사회의 기반을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으며,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였던 농사와 군역 제도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한다. 농경지를 구획해 분배하는 정전(井田)을 행할 수는 없어도 이에 준하는 균분과 항산을 추진하고, 식량 비축을 늘리고 농업용수를 다스리는 수리(水利) 공사를 활발하게 일으켜 절약하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동사회론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을 보장하여 서로 이익을 다투지 않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통치라고 보았으며, 농민 중에 군인을 뽑아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하고 조세를 면제해주는 병농일치적 부병제를 이상적 군사제도로 삼았다.

『홍범연의』 편찬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화폐 제도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경제 구조가 농업 중심이었던 조선에서는 쌀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재화였으나, 사용가치를 지니면서 무게가 가벼워 실용적인 포목이 실물화폐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조정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화폐 제도를 도입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용가치가 없는 금속화폐(동전)를 신뢰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화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자 세금을 동전으로 징수해 백성들에게 동전 구매를 강제했다. 또한 실물화폐와 달리 동전은 개인이 많은 양을 축적하기 용이했고, 부익부빈익빈이 심해지고 생필품의 물가가 폭락·폭등하는 문제가 반복되었다.

『홍범연의』는 이러한 화폐 제도의 문제를 면밀히 분석하며 화폐론을 펼친다. 먼저 화폐의 기능을 철저하게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으로 한정하고, 동전의 가치는 정부가 고정하지 않고 시장의 유통량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화폐 정책의 목표는 재정 확충이 아니라 화폐의 유통량을 조절해 백성들에게 중요한 재화(농산물, 포목 등)의 가치를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세금을 동전으로 납부하는 것에도 회의적이었는데, 관청에서 만들 수 있는 동전의 가치가 풍흉에 따라 결정되는 농산물의 가치보다 유동적이어서 백성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홍범연의』는 재정 확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실행되었던 화폐 제도의 중심에 백성의 삶을 두었다.

『홍범연의』는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서이자 백성을 위한 유학자들의 오랜 고민이 만들어낸 성리학적 이상국가론의 정수이다. 학문과 경전에 매몰되지 않고 200여 년의 역사를 반영하여 지극히 현실적인 국가론을 펼쳤다. 이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고 ‘백성(국민)이 행복한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려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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