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과잉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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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과잉 사회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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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올해도 여지없이 자기계발 관련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도서의 상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새로운 현상은 결코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능력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앞세워 개인의 끊임없는 자기착취와 유연성을 강요하고 과잉경쟁을 유발해왔으므로, 사회학자 세네트(R. Sennet)가 적합하게 표현했듯 ‘유연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은 다수의 사람에게 필수적 요소가 되어버렸다. 평생직장은커녕 대기업도 근속연수가 10년이 채 안 되고, 중소기업 종사자는 근속연수 3~4년이 기본인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통치이데올로기라고 비난을 해도 자기계발이 생존을 위한 강박관념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불안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보호되었다. 대중은 스스로를, 그리고 사회를 조직화하고 시민으로서 개인은 그 안에서 인권과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에 대한 정치적 백래시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마가렛 대처의 표현에 잘 담겨있다. 이제 자기계발은 사회적 연대로부터 멀어진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끔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는 어려우므로 언젠가부터 타인의 삶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척도와 보완재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힘으로 나와 공동체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내기 어렵게 되면서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타인의 삶에 대한 미러링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규율화한다. 우선, TV, 스크린, 유튜브 등 미디어를 통해서 보이는 타인의 삶의 성공 스토리는 확실히 불안한 개인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가 그 인생의 경로 속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성취가 제1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보다는 학력, 스펙, 경쟁에서의 성공 여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공직자로서 저지른 범죄행위도 일류대 출신에 고시를 패스했으면 유능한 인물이 저지를 수 있는 한순간의 실수로 용서가 되고, 예술도 국제경연대회 우승자라면 승자독식이 허용된다. 해외 유수의 콩쿨 우승자가 되면 그 순간 환생한 리스트나 파가니니가 되어버리고, 그들의 진정한 음악성은 평가의 대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이들의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소비되며, 다음 주자가 등장할 때까지는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값비싼 가격으로 보상받는다. 

심지어 대중음악도 경연 우승자는 시장에서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고, 평범한 음악회조차 대중음악인지 창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노래 한 곡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관객은 점수를 매겨 즐거워하니 가히 경쟁에 미친 사회가 아닐 듯싶을 정도이다. 당연히 경쟁의 성취자에 대한 정당한 비평은 따라붙을 수 없다. 우승자에 대한 예술성을 논하는 순간 무능한 자의 근거 없는 질시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성공의 미담은 쿨하게 인정해주는 자세가 그 리그로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 자세이다.

물론 위로의 미러링도 있다. 대인관계가 서툴고, 쉽사리 권태에 빠지고, 육아에 지치고, 사랑과 소통에 서투른 사람들이 나만이 아니라는 위안,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망가졌을지 몰라도 뒤늦게 일상에서 ‘소확행’을 찾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 세상이 나쁜 것만 같지는 않고, 위로를 받는다. 나보다 어려운 타인의 삶은 경쟁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고,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학습되어야 착한 시민의 덕성이 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을 비판하고, 그것에 분노하면, 날 것으로서 패배자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집단환각은 오늘날 공감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단순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다양한 공감 전문가들은 오늘날 공감능력을 앞세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다수의 사람에게 사회 병리현상에 대한 감정이입을 강요한다. 그래서 위로를 앞세운 공감 토크쇼는 분노하지 못하는 루저들의 자기 치유 수단이 되어버렸다. ‘88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소환되기 시작한 청년담론은 공정담론과 정치권의 청년정책 남발로 이어졌고, 다양한 정치적 지형에서 청년 정치인과 청년담당 관료까지 탄생시켰지만, 다수의 청년은 여전히 청년정책의 대상일 뿐이다. 

세대를 가로질러 부부관계와 가족문제까지 공감과잉을 강요하는 공감 비즈니스가 도처에 산재하지만, 무엇이 변했던가? 막상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사고사를 당하거나, 불합리한 고용조건에서 조직적 저항이라도 소환하려면 강성노조의 환영이라도 드리워진 듯 호들갑을 떨거나 냉소적 자세를 보이는 이 자의적이고 선택적인 공감능력은 확실히 반쪽짜리 공감으로 보인다. 시장화된 공감은 개인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의 자생력을 회복하는 데는 멀어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억지 공감 능력과 상처를 입은 영혼의 톡-톡 진혼곡, 사회권력에 대한 배설을 통한 카타르시스 대신 사회문제가 사회의 연대로 전화되는 새로운 희망의 움직임을 기대해본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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