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만나게 해준 책 〈홍위병 - 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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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만나게 해준 책 〈홍위병 - 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3.12.3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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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나는 1968년생이다. 1975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1991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게 당시의 중국이라는 나라는 아예 지구상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공은 6.25 전쟁사에만 등장했다. 훗날 내가 입고 쓰는 물건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이 된다거나 중국인이 등장하는 쇼츠 영상을 일상적으로 보게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책 번역을 시작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중국을 흠씬 공부할 기회가 찾아왔다. 열두 살 때 북경의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인물이 온몸으로 겪어낸 격동의 시대상을 담아 펴낸 회고록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홍위병 - 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2004)이라는 책이었다.  

 

저자이자 책의 주인공 션판은 문화혁명 시작 시기에 열성적인 꼬마 혁명가로 활동한다. 하지만 이른바 ‘인민의 적’들에 대한 잔혹한 처형, 경찰에 체포되어 수난을 겪는 손위 홍위병들, 천안문광장에서 홍위병을 사열하는 마오쩌뚱의 무심한 모습 등을 보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회의감이 싹튼다. 

15세 때 동료 홍위병들과 함께 궁벽한 시골로 보내진다. 혁명 농민들 속에서 기상을 키우라는 명목이었으나 무의미한 노동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맨발의 의사’로 발탁되어 간단한 교육을 받은 후 병원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경험도 한다. 모두에게 경원시되던 지주 계층 출신 인물과 가까이 지낸 덕에 나중에 신분상승한 그의 도움을 받아 전투기 엔진 조립 공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8세의 션판은 공장 노동자로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공부에 매진한다. 대학 입학시험을 보려면 공산당원이 되어야 했으므로 입당을 위해서도 노력한다. 추천을 받기 위해 늙은 당원과 만났다가 성추행까지 당하고 입당에 실패한다. 영어를 가르쳐주던 선생이 정치범으로 체포된 후 션판도 잡혀가 심문 받는 위기를 맞지만 절대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언변을 발휘하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온다.

누구든 대학 입학을 치를 수 있게 제도가 바뀌면서 24세의 션판은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된다. 행복하게 공부하는 한편으로 친한 학우들과 정치 자유화 운동을 벌이고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을 겪는다. 그리고 미국인 영어 선생님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션판은 다시 비밀경찰의 조사를 받고 한동안 첩자 활동을 하지만 이번에도 의미 없는 첩보만 진지하게 나열하는 전략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오지 티베트로 보내질 상황이 벌어지자 오히려 비밀경찰의 힘을 빌려 텐진의 대학 강사로 배치된다.

                          저자   션판

28세의 션판이 부임한 탕구 지역은 극심한 수질 오염으로 남녀노소 모든 주민의 치아가 망가진 곳이었다. 공포에 질린 주인공은 설사병을 꾸며내며 6개월 동안 병원 치료와 전출 신청을 거듭해 겨우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유학을 위한 여권과 비자를 발급 받으려 인맥과 무기(술, 담배 등)를 동원해 투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1984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어떤가. 한 사람이 십대와 이십대에 걸쳐 경험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파란만장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내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인식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 시절에 일어났다.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고 번역하면서 나는 중국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질서를 지키면 손해를 보는 상황, 받아들였던 당 정책이 극명한 모순을 드러내는 상황, 언제 어떻게 끌려가 고초를 당할지 몰라 불안한 상황을 겪은 사람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다시 그 사람이 아는 사람으로 이어가며 단계별로 비용을 쓴 끝에 문제가 해결되는, 사회주의 소련 시절의 모습과 꼭 닮은 그 인맥 동원 방식이 등장할 때면 비판하기보다 감탄하게 되었다. 극한 상황에서 고안된 위대한 생존법이니 말이다.

우스운 사건, 긴장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장면 등이 가득한 이야기책으로 중국 현대사에 접근하고 싶은 독자에게 책을 추천한다. (원문이 영어였던) 책을 번역한 후 나는 초급 중국어를 배웠고 몇 차례 중국 관광을 다녀왔다. 그리고 중국이라는 여전한 수수께끼에 대해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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