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 자본, 화석 경제, 그리고 해방의 전망
상태바
화석 자본, 화석 경제, 그리고 해방의 전망
  • 위대현 이화여대·환경공학
  • 승인 2023.12.31 17: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화석 자본: 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 (안드레아스 말름 지음, 위대현 옮김, 두번째테제, 708쪽, 2023.11)

 

화석연료(fossil fuel)’라는 용어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결정문에 등장한 것은 2021년에 영국 글래스고(Glasgow)에서 개최되었던 COP26에서였다. 소위 글래스고 기후합의(Glasgow Climate Pact)로 불리는 당시의 대표 결정문은 “비효율적인 화석연료 보조금(inefficient fossil fuel subsidies)”을 “축소(phase-down)”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본문에서 이 용어가 언급된 것은 이 단 한 차례뿐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등장한 지 2년이 지난 2023년에야 이 용어는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화석연료로부터 이탈하는 전환(transition away from fossil fuels)”이라는 문구가 바로 얼마 전 막을 내린 COP28의 결의문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 결의문을 두고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 of the Fossil Fuel Era)”을 알리는 “역사적 합의(a historic agreement)”라며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찬사를 보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차라리 주목해야만 할 지점은 기후변화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 결정문에서조차 최근에야 비로소 이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과 그로 인한 온실기체 CO2의 배출이 기후변화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느 소설에 나오던 “이름을-말해서는-안-될-그-자(He-Who-Must-Not-Be-Named)”처럼 이 용어를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애당초 누가, 왜,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였는가?

스웨덴의 룬드 대학교(Lund University)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의 책 《화석 자본: 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Fossil Capital: The Rise of Steam Power and the Roots of Global Warming)》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누가? “화석 자본(fossil capital)”이. 왜? “더 적은 노동자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생산량”을 달성하며 “생산을 더 큰 규모로 다시 개시하고 다시 또 한층 더 큰 규모로 개시”하기 위해서, 즉 “자본의 축적”을 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자본이 그것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본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원동기” ― 19세기 영국에서 이 원동기는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 와 그것이 자본가에게 부여한 이중적 의미의 “역학적-겸-사회적 권력-동력(a mechanical-cum-social power)”을 이용하여. 

 

그래서 이러한 상황, “점차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여 CO2 배출량을 지속해서 증가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자기지속하는(self-sustaining) 성장경제”, 즉 “화석 경제”로 지칭되는 “하나의 총체(a totality)”가 탄생하였다. 마르크스(Marx)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증가한다”면, 이제 화석 경제에서는 “자본의 화석 구성 증가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자본주의 역사 기간 중에 대기 중 CO2 농도 증가의 법칙으로 이어진다.” 그 귀결은 가면 갈수록 더 심화되는 기후변화이다.

물론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화석 경제를 탄생시킨 주체인 화석 자본 ―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 이 될 터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극복해야만 할 “기존 이해관계”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화석연료라는 용어가 최근에야 유엔기후변화협약 결정문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 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를 캐묻는 역사적 탐구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원지인 19세기 영국, 즉 산업혁명의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의 전반부는 그러한 역사적 고찰을 담고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기존의 주류 이론들 ― 결핍이 기술적으로 해소된다는 리카도-맬서스식 패러다임, “인류의 기획(the human enterprise)”이라는 말로 기후변화의 책임을 “하나의 종 전체, 말하자면 인류(the anthropos)”에게 돌리는 인류세(Anthropocene) 서사 등 ― 이 지니는 치명적 오류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근간인 공장제도를 탄생시켰던 수력이 증기력으로 전환되던 당시 ― 1830년대 중반 ― 에조차 수력은 여전히 증기력보다 더 저렴한 동력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즉, 리카도-맬서스식 패러다임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종의 결핍 때문에 증기력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벌어지던 격렬한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자본가 측이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노동을 압도”하여 “실질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해서 “반-노동자(anti-worker)”, 즉 노동자에 대적하는 존재자로서 증기기관을 동원했던 것이다 ― 더 높은 비용을 무릅쓰고.

그리고 당연히 노동자들은 그들의 적인 증기기관에 힘껏 저항하였다. “증기기관에 대항한 파괴 행위의 긴 목록을 짧게 요약한 용어”인 “마개 뽑기(plug drawing)”는 1842년 총파업 ―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이 벌였던 것 중 가장 큰 봉기”이자 “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벌어진 총파업” ― 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남았다.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보일러의 마개를 뽑거나 억지로 보일러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고 … 기관의 작동을 그 즉시 중단시켰다.” 만약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지금도 그것을 악화시키고 있는 화석 경제 탄생의 중요한 계기가 증기기관과 증기력이라면,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인류의 본성”을 들먹이는 인류세 서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붕괴한다. 

                    1842년 당시 신문(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프레스턴 학살을 묘사한 그림
                                 (출처 - https://victorianweb.org/periodicals/iln/38b.html)

당시 증기기관을 환영했던 것은 인류 종 전체는 고사하고 영국에서조차 자본가들뿐이었고, 영국의 노동계급은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분연히 봉기했던 것이다. 압도적 군사력이라는 순수한 폭력을 통해서만 당시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었다. 실상은 “서구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자본가들이 증기에 투자했고 화석 경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 이 역사적 단계에서 종이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자본이 선진국의 제조업 시설을 더 저렴한 노동력을 구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이른바 탄소 누출(carbon leakage)과 관련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미국이나 다른 서구의 노동자들이 제조업을 해외로 이전하자고 결정한 것이 아니다. 사실, 애당초 그런 움직임에 저항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노동자들이다.”

이렇게 기존의 주류 이론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은 이상, 화석 자본과 화석 경제를 분석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는 그 대안이 될 저자의 화석 자본에 대한 기본 이론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13장에서 저자는 화석 경제를 그 요소들 ― 화석 자본, 화석 소비, 화석 자본의 시초축적 ― 로 분해하고, 각 요소의 거동을 설명한다. 

“화석 자본은 화석연료의 CO2로의 변신을 통해서 자기 확장하는 가치다.” 즉, 현재 화석 경제 내의 대부분의 자본이 이 부류에 속한다. 반면에 개인적으로 “화석연료를 사용가치로 구매하여 사용하고 CO2를 배출하는 것”이 “화석 사용가치 소비” 또는 “화석 소비”로 제시된다. 여기서도 CO2가 배출되긴 하지만, “화석 소비 자체만으로 화석 경제를 탄생시킬 수는 없다.” “오로지 화석 자본에서만, 화석연료 소비와 일반적으로 융합된 자기지속성장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로 자기 돈벌이를 위한 직접 상품으로 F[화석연료]를 시장에 공급하는 데 특화된 자본가”가 존재한다. 이게 “화석 자본의 시초축적”이다. 즉,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자본가들과 이들 연료를 이용하는 발전사업자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화석 자본과 화석 자본의 시초축적 회로가 무한히 연장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의 총체로서의 화석 경제의 기본 틀을 이룬다.

게다가 21세기 초 화석 자본은 세계적 이동성을 지닌 자본이 되어 “끊임없는 화석 에너지의 대량소비를 통해서 저렴하고 규율을 잘 따르는 노동력이 있는 위치 ― 바로 잉여가치율이 최대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위치 ― 로 공장을 재배치”한다. 14장에서는 이렇게 화석 자본 세계화의 귀결을 ‘팽창(expansion)’, ‘강도(intensity)’, ‘통합(integration)’이라는 세 가지 효과를 통해 살펴본다. 

팽창 효과는 자본이 선진국에서부터 개발도상국으로 유입되면서 화석 경제가 “이전에는 그러하지 않았거나 미약하게만 그리하였던 지역에까지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개발도상국은 통상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 공급을 위해 선진국보다 더 많은 양의 CO2를 배출하는 경향 ― 더 높은 탄소 강도(carbon intensity) ― 가 있기 때문에 공장의 “재배치를 통해 탄소 강도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이 강도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생산의 거점들과 소비의 거점들이 서로 분리되어 분산되면서 이들을 연결하기 위한 교통, 물류, 통신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회로가 더욱 파편화되고 더욱 통합되면서, 공급망이 더욱 확장되고 더욱 분산되면서, 더 많은 석유가 도로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태워지게 된다.” 이 마지막 효과를 통합 효과라고 부른다. 세계화된 화석 자본은 이 세 가지 효과를 복합적으로 나타내면서 갈수록 더 많은 CO2를 대기 중으로 내뿜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극복해야만 할 화석 자본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면, 이제 해결책을 모색할 차례이다. 15장에서 저자는 트로츠키(Trotsky)를 인용하면서 1920년경 혁명과 내전을 겪던 러시아의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 체제를 해법으로 암시하는데, 만약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정 거북하다면 소위 자유진영의 맹주라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중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펴보아도 무방하다. “진주만 이후 막대한 군사 예산을 편성하면서 미국 국가체제(the American state)는 항공기에서 총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생산을 계획하고 강제로 집행하였다. 행정부는 국가 자원의 흐름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동원했으며, 재산을 징발하고 제조업자들이 계약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였고, 특정 재화 ― 특히 개인 소유의 차량 ― 의 생산을 금지하였다. 즉, 간단히 말해서, 적에게 승리하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전체(in toto) 경제를 동원하였다.”

생각해보라. 요즈음에는 COP 참여자들조차 모두 “2050년 탄소중립”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지만, 실은 그보다 이전 시점인 2030년에 이미 중간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즉, 2030년까지 배출량을 거의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 ― 조금 더 정확히는, 세계적으로 2030년까지 온실기체의 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감축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적는 시점인 2023년 말부터 2030년까지는 겨우 7년밖에 남지 않았다. 2030년을 애써 외면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데, 아마도 역시 7년은 너무 짧다고 느끼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본서 ― 원서는 2016년에 영국 베르소(Verso)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가 비판하는 지구공학(geoengineering)에 바탕을 둔 기법을 추진하기에도 이제는 시간이 충분할 것 같지가 않다 ― 설령 시간이 충분하다고 해도 이는 문제를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행위일 뿐이지만. 

어쨌든 주관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품든지 간에 기후변화가 물리적 현상인 이상 파국 ― 산업화 이전을 기준으로 1.5℃를 상회하는 수준의 온난화 ― 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달성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결코 길지 않은 이 기간에 배출량을 거의 절반으로 감축하기 위해서 달리 어떠한 방법이 존재한단 말인가? 한국을 예로 들자면, 국내 전력 에너지의 약 1%씩을 각각 소비하는 에너지 다소비 기업들의 생산량을 강제로 감산시키지 않고서,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전력과 1차 에너지의 공급을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바꾸지 않고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단기적으로나마 ― 장기적으로 시장경제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우긴다면 ―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과 금융 전반을 사실상 완전히 국유화하는 수준의 경제적 통제를 실시하지 않고서, 그리고 전국적인 노력 동원 없이, 도대체 무슨 수로 저 짧은 기간 내에 이러한 전환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덧붙여 취약계층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생활필수품에 대한 광범위한 배급제가 동시에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대안은 없다. 계획경제는 ‘불가피’하다.” 물론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은 차라리 탄소예산(carbon budget) 장부를 조작하는 편을 선호하겠지만, 그들이 장부에 무슨 수를 어떻게 날조하여 적어 넣더라도 그로 인해 기후변화라는 이 폭풍의 진로는 바뀌지 않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피지배계급 ― 노동계급 ― 의 몫이 될 것이다. 적응(adaptation)도 완화(mitigation)가 실제 진행됨을 전제로 한다. 나라의 1/3이 물에 잠기는 사태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된다. “왜 가망 없는 일에 뛰어들지? … 하지만 패배의 가능성을 안고 싸우는 것은 별로 새로운 사태가 아니다. 지구온난화 자체가 누적된 패배의 귀결이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은 모두 비슷한 조건에 직면했다.” “전망은 암울하다. 그러니까 더더욱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사카 준(戸坂潤)은 그의 저서 《기술의 철학(技術の哲学)》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노동의 조직 · 이 노동력은 최고로 유력한 생산력이며,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의 기술적 능력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정치적 역할 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었다. 말 그대로 본디 자본주의 체제하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둘뿐이다. 자본가 계급의 착취의 굴레 속에서 그의 기술적 능력만을 살려 상품을 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정치적 역할을 어깨에 짊어지고 투쟁으로 새 세상을 생산할 것인가. “노동력은 환원될 수 없고, 장악하기 어려우며, 다루기 힘든 자율성(autonomy)을 지니고 있다.” 영국의 자본가 계급이 자율성을 철저하게 결여한 증기력을 이용해 억압하고자 했던 이 독특한 생산력인 노동력의 자율성은 지금도 여전히 화석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어 중요한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말름의 마무리 문장에 따르면, “가설적으로라도 이러한 기적을 이룰 가능성을 지닌 것은 오직 사람들(humans)뿐이다.”

 

위대현 이화여대·환경공학

이화여자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 친환경 에너지 기술 및 에너지와 환경 간 상호 영향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전국교수노동조합 대외협력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