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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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 김철호 경인교대·윤리학
  • 승인 2023.12.3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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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 (김철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336쪽, 2023.11) 

 

악의 부활: 부시, 트럼프, 바이든   

윤리학에서 악이란 단어가 잘 보이지 않은지는 꽤 오래된 일이다. 근대 윤리학자들은 옳음과 그름에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무어에게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윤리학자들이 선악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표현이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차지했던 중요성을 잃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상생활에서도 악이라는 말은 느낌이 너무 강해 히틀러 같은 인물이 아니면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성서에나 나오는 악마는 더욱 그러하다.

9/11 참사 (출처: 연합뉴스)<br>
                   9/11 참사 (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21세기 언제부터인가 악마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 혹은 시작점은 2002년 부시가 특정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20년 11월,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바이든은 “미국의 암울한 악마화의 시간을 여기에서 끝내자”라고 역설하였다. 한 사람은 악의 실체화를 부추기고 다른 한 사람은 이를 해소시키고자 애쓰지만, 모두 우리시대의 특정한 징후를 가리키기는 매한가지다. 우리사회에 마녀사냥식의 사고, 악마화, 악의 실체화, 마니교적 사고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선악 담론의 특징: 악으로부터 정의되는 선  

우리는 과연 당당한 태도만큼이나 자신만의 고유한 선을 가지고 악을 판단하고 있을까? 바디우는 『윤리학: 악에 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Ethics: An Essay on the Understanding of Evil)』(2001)에서 오늘날 선에 대한 정의는 악이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주체를 가정하고 그들과 다른 자기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는 패턴을 보인다고 진단한 바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을 잘 알고 있고, 이로부터 선이 아닌 것, 즉 악을 정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믿음과는 반대였다. 누가 선을 알겠는가? 그들 대부분은 악으로부터 선을 규정해 왔을 뿐이었다.

우리사회는 어떤가? 한국은 테러가 문제가 되는 사회도 아니고, 인종 문제가 심각한 사회도 아니다. 그렇지만 악마화는 우리사회에서도 점차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 사이트에서 1990년부터 2023년까지 주요 일간지에 보도된 악마화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1990년 0건, 1991년 3건, 2001년 9건, 2011년 25건으로 조금씩 늘어나다가 2015년 134건, 2021년 477건, 2022년 514건, 2023년(12월 28일 기준) 1,413건으로 급증한 것을 볼 수 있다. 2023년 기사의 제목에 나타난 표현들만 보면, 노조의 악마화, 검찰의 악마화, 개인의 악마화, 정치인의 악마화, 교사 악마화, 학부모 악마화, 중국 악마화, 민영화 악마화 등이 사용되었다. 악을 담지한 타자, 나와는 본성 자체가 다른 타자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

이 중 단적으로 우리사회의 악마화 경향성을 보여준 사건이 있다. 2017년 9월 부산에서 중학생들의 폭행사건이 있었다. 당시 가해자 1명은 만 13세여서 형사처벌을 면하였고 나머지 3명도 소년법상 당장 구속이 어려웠다. 소년법 폐지 여론이 들끓었고, ‘중고생의 악마적 범죄, 누가 이런 괴물을 키웠나’, ‘악마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폭행은 잔혹했다’ 같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기사에 등장하는 악마적 존재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스스로를 악마와는 거리가 있는 선한 존재로 여기면서 말이다. 이러한 악마화는 감정의 배설구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개선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는 손쉬운 가치판단에서 벗어나야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여론대로 형법을 손보는 것은 일정 부분 필요할 수 있다. 언제 또 유사한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기에 법적, 제도적 보완이 시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순간 문제는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를 만든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악마를 탓하기 전에,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야 하며, 악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 또한 바뀔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변화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이다.


노자: 선과 악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의 해법은 선악의 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들이 강한 분별심을 바탕으로 자신과 다른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닫힌 사고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선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악을 탄생시키는 행위이다. 유학이나 신학에서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악을 가볍게 만들고 악을 윤리화하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적 기준을 중심에 두는 한 도덕이란 이름의 성스러운 폭력은 불가피하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노자의 통찰은 잊혀진 이야기이거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소규모 공동체를 건설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와 사유의 결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왜일까? 보드리야르는 『테러리즘의 정신』에서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의 선의 발전, 즉 선의 잠재적 확장이 악을 몰아낼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이 동시에 잠재적으로, 그리고 동일한 움직임에 따라 확장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선과 악 가운데 한쪽의 승리가 그와 반대로 다른 한쪽의 소멸을 초래하지 못한다. 선과 악은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들의 관계는 서로 뒤얽혀 있다. 결국 선은 자신이 선이기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악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이 세계적인 힘을 독점할 경우 그에 비례하여 폭력을 야기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노자와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는 선악을 잊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역설하고 있다. 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악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이슬람이 대체하면서 선과 악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사람들의 숭고한 주장과 달리,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선과 악은 서로를 회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동일한 움직임에 따라 동시에 확장된다. 


주희: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식 변화의 또 다른 방향은 주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주희는 도덕적 기준이 악보다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주희는 기질이라는 악의 선험적 근거를 설정함과 동시에 그 ‘근거의 기원’에 본연지성을 둠으로써 악이 지닌 막강한 힘과 그 존재 이유를 모두 설명했다. 이에 대해 어느 제자가 “시대의 커다란 악을 천리라 일컬을 수도 있겠습니까?”(『주자어류』 97권)라고 반발한 적이 있었다. 악을 리와는 별개의 근원을 갖는 것으로 실체화하는 것이 현실을 더 잘 설명하고 더 잘 대응하는 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형법 강화를 외쳤던 우리 시대의 수많은 신문기사나 댓글들과 맥을 같이 한다. 

이에 대해 주희는 본래 측은한 마음에서 시작되었지만 뒤집혀져서 잔인하게 되기도 하고 난폭하게 되기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은 처음부터 폭력을 저지르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의 수준에서는 선을 행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주희는 악을 ‘실질적 고통을 안겨주지만 가상적인’ 존재로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제자는 더 이상 물음을 이어가지는 않았지만, 추측컨대 이런 답변이 만족스럽지도 그 뜻을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형법강화를 외쳤던 수많은 신문기사나 댓글을 쓴 사람들 또한 주희의 답변을 들었다면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악을 이런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서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악을 ‘선의 타락’이거나 ‘선의 결핍'으로 정의했다. 아퀴나스는 “악이 무엇인지는 그 대립물 즉 선을 통해 알려진다. 악은 선 속에서 발견된다”(『신학대전』)라고 악의 기원이 선에 있음을 명확하게 기술했다. 왜 주희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에게서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관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가?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면 특정 인간들은 매우 위험하고 변화 가능성이 없는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심각한 학교 폭력을 일으킨 학생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제거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선험적으로 타고난 악은 교정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이 선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되며, 그것에 관여할 수단도 사라지게 된다. 악한 리(理)가 있다면, 또는 악이 리와 별개의 기원을 지닌다면, 그 리를, 그 별개의 근원을 사람의 힘으로는 되돌릴 방도도 되돌려야 할 책임도 없게 된다. 남는 것은 강력한 처벌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 우리가 악을 선으로부터 정의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이 놓여 있다는 가정 위에 서게 된다. 이것은 악을 선의 품 안에 품는 것이다. 악을 선의 영역 안에 둔다면 선의 완전성이 훼손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때라야 비로소 악의 형이상학적 무게가 줄어들게 된다. 이는 비단 형이상학적 호기심에서 나온 피상적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악마화는 줄어들게 될 것이고, 누구나 언제든 교화 가능한 존재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주희는 어느 제자처럼, 마니교처럼, 부시나 트럼프처럼, 우리 사회의 뉴스 기사와 댓글들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외적이고 실체적인 악에 대한 투쟁에 있다고 보지 않고, 경(敬)이나 격물(格物)을 통해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질의 간섭으로 우리의 마음은 매 순간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마치 훈제된 고기에서 냄새를 완전히 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순간 나와 타자의 연결성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은 이내 다시 꿈틀댈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선한 사람 또한 예외적이다. 악은 평범하다. 기질지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고,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 속에서 충실성 또는 계속함(誠)의 윤리가 필요하다.  

 

김철호 경인교대·윤리학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을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경인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며 성리학의 경(敬)과 불교의 마음챙김 등 동양윤리 가운데 교육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구를 확대해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애초의 출발점이었던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보는 우리 시대 선과 악’의 문제이며, 이를 중심으로 강좌를 운영하고 저술을 집필 중이다. 저역서로는 『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마음챙김명상교육』(역서), 『불교는 왜 진실인가』(역서)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악의 리는 없다-정호의 리유선악에 대한 주희의 해석-」, 「혐오사회에서 노자철학의 의미」, 「도덕적 명상으로서의 경(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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