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의 차이 … 〈한일고금비교론〉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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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의 차이 … 〈한일고금비교론〉 ⑫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12.24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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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일본을 문명개화로 이끈 선각자라고 높이 평가되는 福澤諭吉(후쿠사와유키치)의 <脫亞論>(탈아론)을 읽어보자. “일본은 아시아의 고루함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나 조선은 “古風舊習(고풍구습)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두 惡友(악우)를 사절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은 “형벌이 혹독해” 인민이 살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인민 때문에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國の滅亡を祝す)라는 글에서는 조선이 망해야 고통받는 인민이 살아난다고 했다. 조선의 형벌이 얼마나 혹독했는가? 조선인이 스스로 말한 것은 증거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일본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小田幾五郞(오다이쿠고로우)은 조선어를 철저하게 학습하려고 東萊(동래) 倭館(왜관)에 오래 체재해, 최고 등급의 조선어 통역관이 된 인물이다. 조선의 사정을 여러모로 자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象胥記聞>(쇼우시요키분)이라는 책을 1794년에 썼다. 栗田英二(쿠니타로이지)라는 일본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냈는데, 한국어가 서투른 탓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이따금 있다.

그 책 한 대목에서, 조선에서 형벌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여러 가지로 말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몇 대목을 번역문 그대로 든다. 독음을 달지 않는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설명을 하면서 풀이한다.

 

(가) “監司吏들은 一道의 人命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해도 대개 啓聞한 후에 斬罪가 있다.” (나) “死罪에 覆啓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건의 발생, 도중 경과, 심문[吟味], 死罪의 시비 등을 피의자에게 확인하는 것이다.” (다) “流罪는 죄에 따라 絶島定配, 極邊遠竄 등이 있다.” (라) “禁府에 들어간다는 것은 流罪의 죄인 등을 잡아넣는 것이다. 일단 혐의자를 잡아넣지만, 그 사람의 결백이 증명되면 그 다음 날에는 출근도 한다.” (마) “死刑을 집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며 일 년에 전국에서 한두 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바) “杖罪는 보통 한다.” (사) “杖은 한 번에 30도 한도로 하며...”  

 

무슨 말을 했는지 정리해보자. 죄는 (가)ㆍ(나)ㆍ(마)에서 말한 死罪(사죄), (다)ㆍ(라)에서 말한 (유죄), (바)ㆍ(사)에서 말한 杖罪(장죄)가 있다. 死罪는 사형을 시키는 죄이다. 가장 무거운 죄이다. 流罪는 유배를 보내는 죄이다. 사죄 다음으로 무거운 죄이다. 杖罪는 곤장을 치는 죄이다. 가장 가벼운 죄이다. 

死罪에 대해 한 말을 풀이한다. (가)에서 각도의 감사가 사형 판결을 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을 가졌어도 국왕의 재가를 받고 시행한다고 했다. (나)에서 사형 판결에는 피의자가 하는 말을 듣는 재심이 있다고 했다. (마)에서 사형수는 한 해 동안 전국에서 한두 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사죄 판결은 아주 신중하게 하고, 사형 집행은 아주 드물게 한다고 했다. 

이 말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형이 일본에는 많고 한국에서 적은 것은 사실이고, 이 점을 일본인이 아주 부러워한 것은 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법은 신뢰를 얻어야 정당하다. 이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流罪 판결도 신중하게 했다고 말했다. (라)에서 流罪로 구속된 사람은 구속적부심 같은 것을 거쳐 석방될 수 있다고 했다. 杖罪가 가장 흔한 형벌이라고 (바)에서 말했다. (사)에서는 杖罪人에게 곤장을 30대 이내로 친다고 했다.

일본의 형벌은 어땠던가? 金世濂(김세렴)이라는 조선의 문인이 조선통신사 副使(부사)가 되어 1636년에 일본에 다녀와 견문한 바를 <海槎錄>(해사록)이라는 책에다 기록했다. 권말의 총론인 <聞見雜錄>(문견잡록)에 일본의 형벌에 관해 일본에서 알아본 것을 적었다.  

“倭法(왜법)은 범죄자를 죄가 가볍고 무거운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다.”(犯罪者 無輕重 皆殺之) 서두의 이 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死罪만 있고, 流罪도 杖罪도 없는 것이 조선과 아주 다르다고 했다. 杖罪가 없는 이유를 말했다. 곤장을 치고 말면 “앙심을 품었다가 뒤에 반드시 보복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죄인이 下卒(하졸)이라도, 죄목을 경솔하게 말하지 않다가 목을 벨 때야 알려준다. 독을 품고 해코지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형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하니, 국가와 개인이 힘의 강약으로 구별될 따름이다.

사형 집행을 어떻게 하는가 말했다. “죄가 가벼우면 목을 벤다. 무거우면 十(십)자 나무를 곁에 세워 두 손과 머리를 못질하고, 불로 지지기도 하고 창으로 찌르기도 하는 참혹한 짓을 한다.” 강자가 약자를 처참하게 죽이는 만행을 저질러 쾌감을 누리는 것 같은 사형 방식을 택했다. 그 만행에 누구나 참여했다. “사형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 왜인이 다투어 칼을 시험하고자 한다. 칼날을 갈고 칼끝을 단근질하고 몰려든다. 사형이 집행되면, 모든 칼을 일제히 내려쳐 작살을 낸 것이 만두 속 같게 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 다음의 말은 더욱 끔직하다. “사형하는 장면을 아이들도 반드시 보게 해서, 익숙해져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한다.” 사회 풍조가 어느 정도인지 말했다. “눈을 흘길 일도 반드시 보복하고, 한 마디 말에도 나쁜 마음을 품는다.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고, 굽히지 않는 것을 장기로 여긴다.(以殺人爲能事 不屈爲長技) 웃어른의 위엄이 없고, 형제 사이에도 칼을 내민다. 흉악하며 모질고 참혹하고 악독하기가 뱀의 무리와 다르지 않다.”

福澤諭吉이 조선은 형벌이 혹독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杖罪를 곤장 30대 이내로 다스려 나는 비명 소리 전해 듣고 한 말이리라. 일본에서는 곤장을 치지 않으니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곤장을 치지 않은 이유가 너그럽게 보아주려는 것이 아니고, 복수가 두렵기 때문이다. 모든 죄인을 사형에 처하고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으니, 그 전 단계의 형벌이 혹독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죄인을 사형에 처하고,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는 나라에서 무력한 인민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사형수가 한 해 동안 전국에서 한두 명을 넘지 않은 조선을 크게 나무란 것은 당착이 너무 심하다. 福澤諭吉이 조선이 망해야 고통 받고 있는 인민이 산다고 한 말은 일본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 사람을 위대한 선각자라고 지금도 칭송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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