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족들의 서원문화와 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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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족들의 서원문화와 그 활동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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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당일기 | 윤성훈·장준호·신동훈·백광열·최은주·류인태 지음 | 은행나무 | 324쪽

 

이 책은 역사학, 한문학, 사회학, 인문정보학 등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이 조성당 김택룡이 남긴 생활일기를 분석해 17세기 영남 사족의 생활상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조성당일기』는 조성당 김택룡이 말년에 쓴 생활일기로, 1612년, 1616년, 1617년의 일상을 기록한 세 권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퇴계 이황의 제자로 잘 알려진 월천 조목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고 평생 퇴계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경상도 예안 한곡 지방에 거주하며 마흔둘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약 20년간 대부분 선조 집권 후반기에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정작 아주 높은 지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덕분에 도리어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말년까지 순탄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일기 속에는 당시 김택룡이 나눈 교유 관계, 경상도 예안의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주된 소득원인 농작물 경영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김택룡은 자신이 누구를 만났으며,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또한 첩과 서자, 서녀, 나아가 노비의 이름과 그들의 구체적인 행위 등 아주 시시콜콜한 일까지 성실하게 기록했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걸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향촌 사회 속 양반의 모습을 밀도 높은 일일日日의 나열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데 『조성당일기』의 가치와 차별점이 있다.

『조성당일기』에 기록된 내용 중 매우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는 당시 조선시대 사족들을 연결하고 때로는 그 지위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서원문화다. 김택룡은 낙향 후 후진을 양성하고 스승인 월천을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일을 추진했다. 조선시대 서원에는 당시 학문 발전에 공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를 주향(主享, 위패를 정면에 놓는 것)하여 모셨는데, 이때 제향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선비들의 공론에 따라 국가가 선정했다. 따라서 서원이 사액賜額 받게 되면 해당 서원의 제향자는 물론 그 서원이 위치한 지역, 서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대대손손 그 혜택과 명예를 누릴 수 있어 이는 당시 사족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김택룡은 자신의 스승인 월천을 퇴계의 문인 중 유일하게 도선사원에 종향하는 데 성공했고, 이 ‘월천 종향’ 사건을 통해 그는 원래 그리 높지 않은 신분으로 정계에 진출한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퇴계학파 비월천계 인물들과는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조성당일기』에는 조성당 김택룡이 살았던 16~17세기, 조선 개국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온 사족사회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사족이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로서 경제적 기반을 잡고 이를 혈연과 혼맥을 통해 결집·확장하며 나아가 학맥을 통해 지역사회와 중앙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장해가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성당일기』에는 여타 공적인 기록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사적인 공간에서 영위된 조선시대 사족의 ‘사적인 삶’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일기에는 살림의 근간이 되는 농사를 점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자주 등장하는데, 언제, 노비 누구를 시켜 밭을 갈고 파종했는지, 전토田土 구매를 위해 어디를 다녀오고 또 어떤 조건으로 거래했는지와 같은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스승 월천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은 대부인에게 드리기 위해 손수 꿩 사냥을 해 문병하며 이후 대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조문하는 과정, 아버지와 장인의 기제사에 제수를 준비해 아들, 손자, 조카 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다른 친지들과 모두 모여 제삿밥을 먹는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학문과 문예활동으로서 중국 서적을 구입하고자 할 때에는 어떤 경로로 얼마의 삯을 주고 어떤 책을 구입했는지 등도 소상히 적혀 있어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김택룡은 산수 유람을 즐겼는데, 청량산이나 소백산 등을 다녀온 뒤에는 반드시 그 기록을 한시로 창작해 남겼다. 그는 문장을 짓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고, 아들을 비롯해 이 지역 아이들에게 한시 창작을 강조하고 작법을 익히게 하거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즉석으로 시 짓기도 즐겼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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