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이해하는 ‘칸트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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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이해하는 ‘칸트 윤리학’
  • 박찬구 서울대·철학
  • 승인 2023.12.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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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원전으로 이해하는 칸트 윤리학』 (박찬구 지음, 세창출판사, 368쪽, 2023.11)

 

누구나 알지만 다수가 오해하는 칸트

‘칸트’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하는 정확하고 고지식한 사람”, “원칙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론을 난해한 글로 펼치는 철학자” 등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오죽하면 같은 독일인인 니체조차 “몰취미한 쾨니히스베르크의 중국인, 서툴고 고루한 소인배, 소도시 취향을 지닌, 의무감에 사로잡힌 프로이센의 관리”라고 표현했겠는가. 하지만 실제 칸트는 풍부한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로 회식 자리의 인기를 독차지한 달변가였으며, 명석하면서도 예지 넘치는 강의로 학생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린 명 강사였다. 우리가 칸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편견에 입각한 과장된 이미지부터 불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칸트 윤리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덕·윤리에 관한 어떤 교과서나 이론서이든 칸트 윤리가 거론되지 않는 곳은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공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칸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8세기의 한 독일 철학자가 21세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도 유명한지 아마 독일 사람들조차 어리둥절할 것이다(참고로, 필자가 독일 유학 중 세 들어 살던 집주인은 칸트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렇게 유명한 칸트인데도 필자가 접한 많은 학생과 선생님은 칸트 윤리에 대해 상당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대체로 그들에게 칸트 윤리는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의무, 선의지, 도덕법칙, 정언명령 등의 용어에는 친숙하면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으며, 이 때문인지 칸트 윤리의 근본 취지를 오해하거나, 초점이 빗나간 비판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도 엿보였다. 이런 안타까운 현상의 배후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놓여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교과서나 윤리학 개론서에 등장하는 칸트 관련 서술들이 너무 정형화된(stereotyped) 해석에 근거함으로써 칸트 윤리의 진정한(생생한)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원전이 아닌 2차 서적에 근거한 설명들이 지니기 쉬운 한계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해법은 원전의 내용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칸트의 본래적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밖에 없다.

다음으로, 칸트 윤리에 대한 설명이 그의 인식론을 포함한 전체 철학의 구도 속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되기보다 맥락 없이 단편적으로 서술됨으로써 깊이 있는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한 피상적인 이해는 오해와 왜곡, 잘못된 비판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필자는 그와 같은 반응을 수없이 접한 바 있는데, 인식론에 대한 통찰 아래 윤리학을 다루는 이 책의 접근법이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칸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칸트의 원전 텍스트를 가능한 한 많이 수록하였다. 원래 이 책의 기획 의도 자체가 칸트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칸트의 원전을 읽는 데 부담을 느끼는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의 원전은 잘 읽히지 않기로 유명하다. 굳게 결심하고 『순수이성비판』 완독에 도전했다가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말았다는 얘기를 우리는 흔히 듣는다. 그래서 칸트 철학의 주제 전개에 맞춰 선별된 이 책의 원문들이 독자가 칸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 직접 칸트의 원전을 읽도록 동기 부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사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통해 주제에 걸맞은 칸트의 원전을 읽히면서 진행했던 강의의 소산이기도 하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칸트의 텍스트였건만 이를 직접 접한 학생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고무적이었다. 칸트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신기함 때문인지, 이제까지 어렴풋하게만 알아 왔던 칸트의 본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희열 때문인지 그들은 매우 의욕적으로 강의를 따라왔다. 이 책은 이러한 학생들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전 읽기’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앞서 우리나라의 칸트 윤리학 관련 서술들이 너무 정형화된 틀에 머물러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윤리학 개론서들이 대부분 영미권의 서적이라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영미권의 학문 풍토는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문제는 그러한 풍토에서 진행되는 칸트 읽기나 해석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영미권의 상당수 학자는 칸트의 원전을 정독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경험주의의 필터를 통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어떤 저명한 학자는 칸트를 가리켜 “망상에 빠진 자”라고 표현하는데, 그에게 칸트의 형이상학이나 영성(靈性)이 진심으로 다가왔을 리 없다. 물론 거기서 감동을 받았을 리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2차 서적에 영향 받아 서술된 우리나라 교과서나 개론서의 칸트 이미지가 왜곡되리라는 것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첩경은 우리가 원전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칸트 윤리의 설득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칸트의 윤리학이 오늘날에도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칸트 윤리학은 자연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 다시 말해서 그 특성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근거하여 전개되고 있어 자연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 자연과학이 놀라운 성공을 거듭하던 17세기에 이미 칸트는 경험적‧과학적 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하게 설정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윤리학을 전개했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과학 세계의 경계선, 즉 현상계의 한계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 부분을 다룬 것이 곧 제2강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무엇인가?”와 제3강 “수학과 자연과학을 넘어 형이상학으로”이다.

둘째, 칸트의 사상은 불교 사상의 기본 맥락과 통할 수 있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칸트의 인식론은 마치 불교처럼 모든 대상 세계를 주관이 구성한 관념의 세계로 간주한다. 이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현상적(경험적) 자아의 차원을 넘어 본체적(선험적 또는 예지적) 자아에 주목하는 점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또는 “무아론(無我論)”에 비견할 만하며, 더 나아가 “참나(眞如)” 또는 “일심(一心)” 개념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부분을 다룬 것이 제4강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셋째, 칸트의 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과 양립할 수 있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자연에 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특수한 경험 양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뉴턴 물리학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개념을 부정한 현대 물리학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 칸트는 기계론적 결정론(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자연 세계와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 도덕 세계가 서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로써 현상 세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영역과 도덕 세계를 탐구하는 윤리학의 영역이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지닐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부분을 다룬 것이 제5강 “도덕의 세계와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넷째, 칸트 윤리학은 전통적 유교 사상의 기본 맥락과 통할 수 있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많이 현대화되고 서구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치관 속에는 전통적 유교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다. 그런데 유학의 인성론(人性論)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래 하늘이 부여한 선한 본성이 있고 인간은 마땅히 그것을 따라야 하되 욕심이 앞을 가릴 수 있으므로 우리는 늘 수양에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도 칸트의 윤리는 유학의 윤리와 통하는 데가 있다. 예컨대 유학 사상에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에 대한 논의는 칸트 윤리학에서 도덕법칙과 준칙의 관계에 비견할 수 있고,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慾)에 대한 강조는 칸트 윤리에서 경향성을 극복하고 도덕법칙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점과 통한다. 우리가 칸트의 윤리를 접하는 가운데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전통 윤리가 지닌 형이상학적 토대가 칸트 윤리학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도덕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다룬 부분이 제6강 “도덕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와 제7강 “선의지란 무엇인가?”이다.

다섯째, 칸트 윤리학은 도덕적 회의주의와 냉소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에서 윤리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생겨난 이기주의, 물질만능, 금전만능의 풍조로 인해 도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급기야 자기의 물질적·금전적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까지 만연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극복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강력하면서도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윤리학이 필요하다. 이에 칸트 윤리학은 도덕법칙의 정언적(무조건적) 성격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윤리를 다시 세우는 데 하나의 출발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다룬 것이 제8강 “도덕법칙이란 무엇인가?”와 제9강 “도덕법칙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이다.

여섯째, 칸트 윤리학은 도덕적 동기의 본질과 도덕교육의 의의 및 방법을 분명히 보여준다. 흔히 도덕적 동기라고 하면 도덕규범이나 원리를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심리적 동기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심리학적 접근은 칸트의 윤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현상 세계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일종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도덕의 동기로 작용하는 “도덕적 감정”은 그러한 심리학적 기제가 아니라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 및 경외감, 또는 우리가 도덕법칙을 실천했을 때 뒤따르는 도덕적 만족감을 의미한다. 한편 칸트에게 도덕교육은 교육의 최종 단계인 인격 교육으로서 그 과제는 품성을 정초하는 일(자기 강제를 습관화하는 덕의 함양)이다. 이러한 부분을 다룬 것이 제10강 “도덕적 감정이란 무엇인가?”와 제11강 “도덕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이다.

일곱째, 그간의 선입견과 달리 칸트 윤리학은 단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도덕 원리만을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구체적 윤리 이슈들도 (물론 경험적 사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도덕 형이상학의 견지에서) 다루는 일종의 응용윤리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다룬 것이 제12강과 제13강 “『도덕형이상학』 「덕론」의 이슈들 1, 2”이다. 이를 통해 “칸트 윤리학은 형식주의에 치우쳐 우리의 현실 삶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의 규칙들을 제공해 주지 못 한다”라는 세간의 비판이 해소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덟째, 칸트 윤리학은 도덕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는다. 도덕과 행복 간의 불일치 문제를 (다소 모호해 보이는) “요청(Postulat)” 개념을 통해 해결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사실상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과학적·합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도덕의 실현을 위해 다음 생이 있어야 한다”거나, “도덕성에 걸맞은 행복을 보장해 줄 신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어딘가 억지스럽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늘 체계적이고 탄탄한 논증을 전개해 온 칸트의 철학도 결국에는 “선한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라는 평범한 결론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필자는 이런 ‘평범한’ 결론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자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상계에 속한 존재로서 우리는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살기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예지계에도 속한 존재로서 가능한 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 의무를 다한 사람이 마땅히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지만, 이것이 현세에서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 또한 우리의 상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현세에서건 내세에서건) 가능해야 한다는 것과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칸트 윤리학에서 우리는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박찬구 서울대·철학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윤리교육과를 졸업했으며,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생명윤리학회·한국윤리학회·한국철학적인간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서양 윤리 사상의 이해』, 『생활 속의 응용 윤리』, 『(사상과 인물로 본) 철학적 인간학』,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 읽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교육론』-칸트전집13,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공역), 『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견』(공역), 『윤리학의 다섯 가지 유형』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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