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와 새로운 세계 만들기(worlding)를 위한 신물질주의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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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와 새로운 세계 만들기(worlding)를 위한 신물질주의 패러다임
  • 곽영순 한국교원대·과학교육
  • 승인 2023.12.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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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_ 『인류세와 신물질주의 질적연구 패러다임』 (곽영순 지음, 교육과학사, 354쪽, 2023.11)

 

인류세 담론을 계기로 널리 알려진 신(新)물질주의 혹은 물질적 전회란 기존 인간중심주의에서 탈인간중심주의(post-humanism)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인류세(anthropocene)란 인간(anthropo)과 새로움(cene)의 합성어로, 호모사피엔스 등과 같은 호모 종(species)이 살았던 시기를 기념하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가리킨다. 현생인류인 근대인들(humans)이 홀로세(Holocene)를 살아가고 있는데, 인류가 지구생태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인간이 초래한 지질시대인 인류세에 접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류세의 정식 등록 여부는 2024년 8월 부산에서 열리는 제37차 세계지질과학총회(IGC)에서 최종 결정된다.

4차 산업혁명과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상의 인간과 비인간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기념하는 인류세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고 진단하는 철학자들은 인간중심주의로 대표되는 (후기)근대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를 특징으로 하는 탈인간중심적 움직임이 등장하였다고 말한다. 아상블라주 이론, 수행적 신물질주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객체지향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등과 같은 다양한 탈인간중심주의 이론들은 담론의 중심을 주체에서 객체(비인간)로 옮기면서, 리얼리티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속에서 창발한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의 신물질주의 물질적 전회를 스피노자의 생성존재론,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퍼스의 실용주의 존재인식론,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 그리고 면면히 우리를 만들어 온 노장과 원효의 사유 등을 다시 써 내려간 것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인류세라는 전환점에서 ‘세계가 계속 우리 없이 변하지 않도록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없는 세계가 되지 않도록(Gunther Anders, 1995; 이기상, 2001)' 질적 연구를 방편으로 하여 ‘없이-있음(無)’에서 찰나적인 ‘있음’으로 생기한 인간 종의 객체와의 관계 맺기 방식을 탐구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을 통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물질성은 언어와 대비되곤 한다(김환석, 2016). 인간 이성의 징표인 ‘언어’가 아니라 ‘물질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을 지닌다. 질적연구에서도 기존 인간중심적인 패러다임들이 생활세계에서 물질성의 역할을 간과한다는 비판이 등장하면서 신물질주의적 생태주의, 참여적 패러다임으로 옮겨간다.

양적연구를 뒷받침하는 실증주의 패러다임과는 달리, 질적연구에서는 실증주의 혹은 후기실증주의 이후에 등장한 다양한 연구 패러다임을 특징으로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페미니즘, 퀴어 이론, 탈식민주의 등과 같은 비판적 패러다임에서는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광기 등 동일자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이성중심적 구성철학의 존재론적 분할을 해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언어적 전회를 계기로 의미, 담론, 문화 등을 중심으로 존재와 인식을 설명하려는 사회적 구성주의와 후기구조주의가 질적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 역할을 하였다.

인간세계 내부의 구획과 차별을 비판하던 이러한 움직임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인간중심주의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전환하였다. 다양한 버전의 신물질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인간 객체도 행위주체성을 지니며, 따라서 지구생태 위기의 책임도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무(無)의 반란과 생태주의

김형효(2005)는 철학사를 구성철학(constructive philosophy)과 해체철학(deconstructive philosophy)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구성철학이란 인간 주체의 이성과 의지의 노력으로 진리를 구성하여 세상을 구제하려는 철학이다. 이렇듯 이성을 지닌 인간이 규정한 것을 전체라고 보게 되면,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존재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근대 서구 구성철학의 인간중심주의와는 달리, 해체철학에서는 생태주의와 생성과 관계의 사유를 강조한다. 탈인간중심적 신물질주의는 멀게는 노자나 원효, 그리고 스피노자, 니체 등의 철학을 다시 소환한 것이기도 하다. 즉, 동서양과 시공간을 가로질러 원효의 화엄불교, 노장(老莊) 철학,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에 이르는 일원론적 철학은 인간 사유 중심의 동일성 철학을 해체하고 사물 중심의 생성철학을 복원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무와의 관계맺음’을 말해왔다. 지금 인류는 지구생명, 우주생명 등의 파괴와 지구생태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인간중심의 인식론적 사유에서 ‘없는 것(無)’으로 간주해 왔던 무(無)의 반란이라고 철학자 이기상은 진단한다. 

구성철학은 인간 이성으로 구성한 형상(理)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해체철학에서는 형상으로 담아낸 존재 바깥에서,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더 근원적인 것을 질료(氣)로 파악한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 따르면, 질료(氣)를 떠난 형상(理)은 없으며 기(氣)의 장구한 생성변화 과정에서 어떤 동일성(species)이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서 형상(form)이라는 영어 표현은 희랍어의 에이도스(eidos) 혹은 라틴어의 스피시즈(species)에 해당한다. 달리 말해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 같은 종(species)이라는 형상조차도 그 본질(essence)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과 종 사이가 섞이거나 변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를 두고 베르그송은 ‘진화의 역사를 보면 자기 종의 에센스를 고집하는 생물체는 결국 멸종한다.’라고 말하였다. 


차이 나는 반복을 위한 변혁적 역량

참으로 있는 것, 즉 ‘있음(존재)’의 원형은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이며, 이러한 ‘없이-있음’인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찰나적인 ‘있음’이 연생으로 생기하고 사라지는데, 이를 그때마다의 도(道), 리(理), 성(性), 존재 등으로 이름(form)으로나마 붙잡아 보려던 존재 물음의 역사가 철학의 역사라고 이기상은 말한다. 

다시 땅에 발을 딛고서, 글로벌 교육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OECD Education 2030 프로젝트에서는 학생의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통한 변혁적 역량을 강조한다. 변혁적(trans-form-ative) 역량이란 새로운 형상, 즉 새로운 동일성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들뢰즈의 생성(becoming) 존재론과 윤리적 주체로 연결된다. 들뢰즈는 우리 몸을 포함한 우주는 어떤 동일성(form)을 전제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차이생성(differentiation) 과정에 어떤 반복(form)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변혁적 역량은 차이나는 반복, 차이를 생성하는 역량을 함축한다.

신물질주의에서는 행위주체성(agency) 개념을 인간, 비인간, 자연, 인간너머 인간 등으로까지 확장할 뿐만 아니라, 리얼리티란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라 행위주체들 사이의 관계들 속에서 창발하는 것이라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을 주장한다. 노장(老莊)의 무위(無爲) 철학은 물론 원효의 화쟁사상도 차이와 관계의 사유(김형효, 1999), 즉 만물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의 천을 짜야 성립한다는 연기(緣起)를 주장한다(김형효, 2004).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간-접힘을 계기로 신물질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중심의 서구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몰아낸 ‘없이-있음(無)’과의 새로운 관계맺음을 요청한다. 요컨대 신물질주의 질적연구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뿐인 지구 존재를 비롯하여 인간 너머(more-than-human)의 존재들이 동등한 행위주체로서 상호의존적으로 얽힌 존재론적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통해 어떤 세계 만들기(worlding)에 참여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곽영순 한국교원대·과학교육

한국교원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및 同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The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선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인류세와 신물질주의 질적연구 패러다임>, <교사 그리고 질적연구>, <과학교육자를 위한 철학이야기>, <교사 학습공동체 - 신자유주의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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