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은 역사가, ‘에드워드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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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은 역사가, ‘에드워드 카’
  • 박원용 부경대·사학
  • 승인 2023.12.1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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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에드워드 카』 (박원용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23쪽, 2023.11)

 

제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 과정을 선명히 기억하는 나는 근래에 개봉된 <서울의 봄>과 같은 영화에 20·30 세대가 대단한 호응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MZ세대로 통칭되는 신세대가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고 개인의 협소한 세계관에 갇혀 있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엄밀한 역사자료를 통해 재현하지 않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신세대는 지난 시대의 유산이 현재의 우리를 어떻게 옥죄고 있는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역사는 과거의 시간 틀에 갇혀 있는 죽어 있는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게 작용한다는 인식을 신세대는 할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재적 유용성을 E. H. 카만큼 강조한 역사가도 없을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잘 알려진 정의도 역사가 현재의 필요성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기술된다는 인식의 반영이었다. 카에게 역사란 호고가들의 취미가 아니라 현재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현재는 물론 미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은 역사의 본질을 대중 강연을 통해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물이 그를 20세기의 가장 대중적 역사가 중의 하나로 만든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카와 《역사란 무엇인가》가 한 묶음으로 오래 언급되다 보니 일반 독자들은 카를 역사철학자로 오인하고 있다. 카의 다채로운 학문 경력과 학자로서의 실천적 삶은 《역사란 무엇인가》만으로 대표될 수는 없다. 그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게르첸 등의 러시아 사상가들에 대한 저서와 더불어 《20년의 위기》라는 지금까지도 국제관계학의 고전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저서를 출간한 뛰어난 학자였다. 

학자로서 카의 업적 목록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저서가 또한 존재한다. 3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여 총 14권으로 완성한 《소비에트 러시아사》가 그것이다. 9권과 10권은 R. W. 데이비스와 공동작업이었기 때문에 14권 전체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데이비스의 기여도 적지 않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카의 학문적 열정 대부분을 바친 역작이다. 카 자신도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역사가로서 카를 대표하는 결과물이었다.

 

                                                           A History of Soviet Russia

나는 《E. H. 카 평전》과 같은 번역서를 통해 다방면에 걸친 카의 학문적 업적과 그의 삶 전체를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학자로서 카의 공적인 삶은 물론 세 여인의 남편으로서 그가 겪었던 사적인 삶까지도 소개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번역서의 의미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세세하게 재현하려는 평전의 목적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그것은 일반 독자들에게 다소 부담스러운 대상이었다. ‘벽돌책’에 대한 부담을 해소하고 10개의 키워드를 통해 역사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카의 삶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

외교관으로서 첫 사회경력을 시작하면서 유럽 국제 질서의 수립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던 카는 일차 세계대전과 같은 또 다른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의 이념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카가 보기에 환상에 불과했다. 당시의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속했던 자유주의 이념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던 카에게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 사상가들의 시각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합리적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사회발전을 가져온다는 자유주의적 이상은 인간본성에 관한 러시아 문호들의 철학적 고찰을 참고할 때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평화추구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평화를 깨뜨릴 때 받게 될 비난을 원치 않기 때문에 전후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가정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무시한 순진한 발상에 불과했다. 전후 국제 질서의 주도자들은 보편적 이익이라는 수사 뒤에서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려는 모순적 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교관으로서 기능적 삶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미래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카는 모색했다. 국제관계학 교수로서 새로운 도전은 자신이 속한 당대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삶의 표출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에 대한 일방적 희생만으로 유럽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고 역설한 카의 기대와는 달리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은 재차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난 이후 카는 새로운 실천 과제에 직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기여가 적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카가 보기에 이념에 경도되어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적 경로를 무시한 채 이념적 잣대만으로 국제 질서의 한 축을 구성하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카의 기질상 용납할 수 없었다. 냉전 체제에서 타도해야 할 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관한 역사적 탐구를 통해 카는 자신이 속한 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단서는 물론 미래의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고 싶었다. 역사가로서 카의 업적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출발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카의 이러한 의도가 냉전적 사고가 팽배한 사회 안에서 환영받기는 어려웠다. 카는 자본주의 진영의 순진한 독자들에게 불순한 사상을 퍼뜨리는 지적 사기꾼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자신을 향한 냉소적 시선에 카는 굴복하지 않았다. 카는 “나무 쟁기로 일하던 러시아 농민에게 원자로를 갖춘 러시아를 제공”한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다. 스탈린 체제가 그러한 힘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적지 않은 농민의 희생도 있었다고 카는 인정하였지만 스탈린 체제는 러시아의 과거 인민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물질적 혜택을 제공했다. 단기간의 계획경제가 소비에트 러시아에 가져온 성과를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카는 자신이 속한 체제의 진보를 위한 단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념적 편향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진영의 발전에 활용될 수 있는 상대 진영의 장점에 대한 무시는 실천적 역사가 카의 관점에서 어리석은 것이었다.

카는 《소비에트 러시아사》가 자신이 속한 체제의 진보에도 이바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집필을 지속해 나가면서 동시에 역사의 본질에 대한 대중 강연을 통해서도 자신의 길고 긴 여정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런 면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실천적 의지를 근원적 측면에서 보완하려는 그의 또 다른 시도였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연관 속에서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그의 역사관은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고 집필에 전념케 한 추동력이었다. 즉 혁명 직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를 자신이 속한 영국 사회의 현실, 더 나아가 미래의 발전 방향과 연관시켜 검토할 때 그 역사는 현 순간까지의 역사상을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 및 미래와의 연관 속에서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시도는 역사가인 카에게 역사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실천의 방식이었다.

더 나은 현재 및 미래의 필요에 부응하는 역사를 강조하다 보면 역사의 진실은 희미해지고 상대주의적 역사관만 남는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더 나은 사회라는 규정은 역사적 경험의 축적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적 필요에 따른 과거 재현의 강조가 상대적 진실만을 드러낸다는 회의적 사고에 빠질 필요는 없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과거의 재현이 절대적이 아닐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부정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도 간주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이다. 과거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임을 인정하지만 이를 통해 과거의 진실 일부분이 드러났다는 긍정적 사고도 가져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관계를 카는 자신의 기나긴 학문적 여정 속에서 잃지 않았고 그것이 그를 생의 말년까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빛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박원용 부경대·사학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학사,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고등교육 제도 개혁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신체문화와 스포츠≫, ≪해양사의 명장면≫(공저), ≪스포츠가 역사를 말하다≫(공저), 역서로 ≪에릭 홉스봄 평전≫, ≪역사에 대해 생각하기≫, ≪E.H. 카 평전≫, ≪10월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등이 있으며, “냉전기(1950∼1975) 올림픽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이미지 전쟁”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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