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에서 전후 시기까지 포드주의의 새로운 세계사
상태바
대공황에서 전후 시기까지 포드주의의 새로운 세계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16 2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 나치 독일,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산업화를 향한 경쟁 | 스테판 링크 지음 | 오선실 옮김 | 너머북스 | 512쪽

 

이 책은 경제 위기와 이데올로기적 혼돈 속에서 독일과 소련이 포드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20세기의 첫 십 년 동안 전 세계의 관찰자들은 미국의 급격한 부상과 자동차 산업이 밀접하게 관련됨을 포착했다. 1930년대에는 전 세계의 엔지니어들이 미국을 본받고, 도전하기 위해 디트로이트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가장 열정적이었던 이들은 자동차 대량생산기술, 즉 ‘포드주의’를 연구하고 모방하고 때로는 훔쳐내고자 한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문가들이었다. 

1930년대는 세계 각국이 자유시장의 확대와 세계화라는 발전궤도에서 잠시 이탈한 예외적인 시기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글로벌 대량생산체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의 반대편에 서 있던 나치 독일과 소련이 그에 앞장섰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반전의 역사의 배후에는 미국 중서부에서 탄생해 전 세계를 매료시킨 ‘포드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자 스테판 링크는 포드주의의 기원을 미국 중서부 포퓰리즘에서 찾아내고, 헨리 포드의 반자유주의적 전망이 어떻게 나치와 소련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포드주의는 20세기에 새로운 시대정신이 수혈되어야 한다고 믿은 포스트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를 대체할 가장 매력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동시에 포드주의 기술 이전은 전시 체제를 확립하고, 미국의 패권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기도 했다.

이 책은 윌리엄 베르너, 페르디난드 포르셰, 스테판 다이베츠와 같은 디트로이트 방문객들이 포드주의를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그것을 총력전에 동원하도록 조력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부상과 대공황을 계기로 촉발된 포드주의를 향한 산업화 경쟁이 명백하게 반자유주의적인 궤적을 따라 진행되었음을 논증함으로써 20세기 글로벌 대량생산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의 산물이라는 관념에 도전한다. 

저자 링크는 포드의 경영 철학을 분석함으로써 조립라인으로 설명되는 포드주의의 근저에 포퓰리즘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이렇듯 미국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국면으로 인식되어온 포드주의가 근대화 과정 혹은 자본 축적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미국 중서부 기계공, 농부들의 생산자-포퓰리즘에 기반한 적극적인 기술 선택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링크는 우선 그람시를 비롯한 유럽의 좌파와 우파 양 진영의 포스트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포드주의를 1920-30년대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헤쳐나가는 나침반으로 삼았는지를 살펴보며 포드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링크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포드의 자서전 『나의 삶과 일』이 전 세계적으로 일으킨 반향에 주목했다. 이 책은 특히 나치 독일과 소련에서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미국의 부상을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반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양국이 포드주의의 교과서에 열광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나치 독일과 소련은 『나의 삶과 일』을 통해 미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른 비결을 두려운 시선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둘째, 사업은 사익이 아니라 집단의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포드의 신념이 양국의 반자유주의적 영감을 자극했다. 포드주의로부터 미국과 자유주의에 대항할 실마리를 찾은 나치 독일과 소련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자국의 엔지니어들을 디트로이트로 파견한 것이다.

이 책의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전간기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데 있다. 전쟁과 대공황으로 세계가 쪼개지고 국제적 고립이 강화되었다고 여겨지던 전간기에 이미 포드주의는 전 세계를 활발하게 이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포드주의를 옮겨심기 위해 세계 각국이 벌인 경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전방에는 디트로이트로 향한 엔지니어들이, 후방에는 산업가·정치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세계시장에서 미국이 점하고 있는 우위에 도전한다는 공동의 목표하에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의 기술 이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글로벌 대량생산체제가 완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링크는 광범위한 문헌 조사로 이 과정을 치밀하고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역사의 역설을 밝혀낸다.

책의 후반부는 1930년대에 소련과 나치 독일이 미국의 대량생산 기술을 배워 자체 포드주의를 만들어내려고 기울인 노력을 탐구한다. 그리고 두 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포드주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본다. 소련이 강력한 국가 주도 산업화를 통해 ‘가즈’를 건설했다면, 독일은 포드주의 기술 이전을 통해 인민의 차 ‘폭스바겐’을 탄생시켰다. ‘인민의 차’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이다. 이러한 인민의 차 기획은 오늘날까지 선도적인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폭스바겐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을 뿐만 아니라,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했다.

포드주의로 무장한 독일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었다. 이른바 “공장들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승기를 잡은 것은 소련이었는데, 저자는 소련이 자원과 노동력을 더욱 강하게 통제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대량생산의 도입을 둘러싼 강제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것으로 책의 포문을 연 저자는 포드주의의 영향력이 전쟁의 형태를 빌려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과정까지 그려내고 있다. 소련과 나치의 포드주의를 향한 노력은 결국 1930년대 후반 전쟁과 재무장 경제라는 맥락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고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