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여성주의 담론을 혁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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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성주의 담론을 혁신할 때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2.1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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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360쪽

 

이 책은 한국 사회 일상을 뒤덮은 성정치학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구성해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묻는다.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성에게 페미니즘은 삶의 기본값이 되었지만, 남성 문화는 한국 사회의 낡은 권력 담론을 내려놓지 못한 채, ‘혐오’에 가까운 반격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성 운동 안에서도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트랜스젠더, 난민, 장애인을 비롯한 다른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이들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불화와 간극이 깊어지는 시대, 페미니즘의 언어는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현실을 바꿔야 할까?

이 책은 자본의 질주 속에 각자도생하는 인류세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더욱 복잡해진 젠더 권력과 여성주의 담론을 분석한다. 성차별, 페미사이드, 세계 최저 출생률, 여성 할당제를 비롯한 첨예한 ‘젠더 갈등’ 이슈들부터, ‘피해자 중심주의’ ‘성적 자기 결정권’ ‘여성성의 자원화’ 같은 여성주의 담론에 이르기까지, 당대 성정치학의 논쟁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재해석한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을 허물고, 경계를 사유하며, 기성 담론의 전복적인 재해석을 시도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강남역 사건과 신당역 사건, 미투 운동, ‘여성가족부 존폐’ 논란, 징병제 등 성차별과 성범죄, 성 문화에 관한 남녀의 인식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과 혼란의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모두가 불만스러워하고 고통을 호소하지만,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극단화되고 양극화된 현실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는 논의하기를 꺼리거나 아니면 정쟁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당대의 논쟁적인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 남성 문화의 억압적이고 뿌리 깊은 젠더 권력을 하나하나 들추어낸다. 동시에 여성주의와 여성 운동 내부로 향해 여성, 성 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페미니즘 담론의 정체와 후퇴에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당대의 젠더 문제를 여성주의 담론의 위기로 바라본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정체성의 정치’로 환원하는 태도나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아도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일부 여성의 인식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더불어 ‘피해자 중심주의’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비롯해 지금까지 여성 운동을 이끈 핵심 이념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여성 피해자에게 유리한 전략인지,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고착화하는 건 아닌지 질문한다.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은 더 논쟁적이다. 특히 여성성은 기존에는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부 여성에게는 자원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희진은 이를 해석해내고 비판하는 적극적인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장에서는 젠더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가장 논쟁적인 이슈를 들여다본다. 2016년 강남역 사건과 2022년 신당역 사건의 가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를 비판하는 것이 미소지니(여성혐오)인지,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특히 저출산/저출생을 ‘사회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직장)과 사적 영역(집)에서 ‘이중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의식화된 대응으로 평가한다.

2장은 ‘일상’의 섹슈얼리티 이슈 전반을 다루면서, 특히 한국 남성의 젠더 고정관념을 문제 삼는다. 남성을 위한 섹스 대용품인 ‘리얼 돌(real doll)’이 성적 고정관념을 어떻게 반복하는지, 성폭력 범죄를 구조적 문제나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착하는 것이 왜 문제적인지, 군사주의 문화에서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이 왜 남성의 인권 문제에서 중요한지 설명한다.

3장은 기존의 이성애, 시스젠더(cisgender)를 규범으로 하는 성별 정체성 담론을 해체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무성애와 유성애의 연속선상에서 다양한 성애의 모습을 설명하고, ‘인터섹스(간성間性)’의 인권과 스포츠 선수의 성별 논란을 다룬다. 이를 통해 누가 남성이고 여성인지, 그 차이를 누가 나누는지 문제 제기하며,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되새긴다.

4장은 성매매와 성폭력을 중심으로 삼아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의 의미를 분석한다. 성별에 따라 성적 자기 결정권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여성의 몸을 공간화해 온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들여다보고, 동시에 이 개념이 왜 여성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는지, ‘생명권’ 대 ‘자기 결정권’ 구도는 왜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오는지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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