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교회미술의 보고, 카파도키아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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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교회미술의 보고, 카파도키아 미술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2.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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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 미술: 비잔티움 천 년의 기억 | 조수정 지음 | 아카넷 | 332쪽

 

이 책은 비잔티움 제국 시기의 카파도키아에서 전개된 예술의 면모를 조명한다. 카파도키아 교회의 회화를 초기 발달단계, 성화상 논쟁과 마케도니아 르네상스, 위기의 시대,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문화 접변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시기별 주요 도상(圖像)의 기원과 의미, 역할을 살폈다. 

특히 카파도키아의 비잔티움 교회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대상으로, 각 도상의 해석, 조형적 요소의 기원과 의미, 그 변화 양상, 교회 내부 장식에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의 관계와 의미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설명했다. 또한 이슬람과의 문화 접변으로서 어떻게 비잔티움 미술이 변용 혹은 재창조되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마지막 장에서 다루었다.

카파도키아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부터 교회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4세기경에는 카이사레아의 성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저명한 교부(敎父)들이 활동했던 곳으로서 그리스도교 성지로 이름이 높았던 지방이다. 이렇게 많은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수도원 밀집 지역을 이루었기에 카파도키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더 활발하게 교회미술이 전개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비잔티움 교회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바위산을 깎아 만든 암혈 건물이라는 건축적 특성과 대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외딴곳에 세워진 지리적 특성 때문에 후대의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고,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암혈 교회라는 특징 덕분에 프레스코화들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한 교회는 300개가 넘으며,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교회를 합하면 교회의 수는 1,000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비잔티움 제국 시기 카파도키아의 역사는 미술 양식의 변화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비잔티움 제국 초기부터 성화상 논쟁까지의 시기로, 특히 7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변모의 시기’ 혹은 ‘암흑기’로 불린다. 이 시기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뿐 아니라 성상파괴주의의 여파로 건축과 회화 등 예술 분야에서 일대 침체기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성화상 논쟁 시기를 대변하는 독특한 작품들이 남아 있어 당대 성상파괴주의가 교회와 예술에 끼친 영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두 번째는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로 당대 사람들은 이를 ‘제2의 헬레니즘’으로 생각했을 정로도 번영을 누리던 때였다. 종교예술 활동은 절정에 달했는데,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새로 지어지거나 보수되었고, 다수의 예술품이 제작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카파도키아의 암혈 교회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세 번째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 시기로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튀르크 정복과 카파도키아의 문화 재생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13세기 동안의 기간이다. 비잔티움의 세력이 약화하는 가운데 1082년 카이사레아가 점령당하는 수난을 겪은 카파도키아는 이후 룸 이슬람 왕조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의 예술은 카파도키아 지방 전통, 튀르크 문화, 니케아 왕조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카파도키아의 프레스코화는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단순히 교회 내부 장식의 기능을 넘어서 건물의 용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고, 후원자의 역할이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상황, 카파도키아 지역민의 종교심과 생활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파도키아에서 초기 비잔티움 시기부터 유행했던 도상인 십자가는 당대의 성 십자가 경배 신심과 풍습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건축되었던 성당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성화상 논쟁 시기에는 교회 내부 장식을 위해 양식화된 덩굴 문양 등으로 채워진 바탕 위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려 넣는 경우가 많으며, 고전적 모티프인 풍요의 뿔, 포도나무, 석류, 아칸서스, 월계수, 공작 깃털을 장식적으로 변형한 문양을 즐겨 사용했다. 결국 십자가의 형상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 건축된 성당들은 모두 작은 규모이며 내부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으로만 장식되어 있어 정치적 혼란이 몰고 온 경제난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로 불리는 9~10세기에 카파도키아 미술은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때 매우 많은 교회가 건립되었고 그 내부도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1세기 중반까지 매우 많은 성당이 세워졌는데, 수도원 성당이나 개인용 성당이 주를 이루었고, 후원자는 대부분 비잔티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평신도들이었다. 후원자의 초상이 카파도키아 지역의 성당 곳곳에 남아 있는데, 때로는 그들의 이름이나 관직 등 부가 사항도 적혀 있어 당대 카파도키아 지역의 생활상과 그리스도교 신심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당 내부장식은 후원자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회화처럼 정교한 신학 체계를 반영하는 도상 체계를 도입하기도 하고, 십자가나 후원자의 초상으로 만족하는 단순한 도상체계를 따르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12세기에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된 카파도키아에서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전통적 그리스도교 도상이 큰 변화를 겪었다. 이슬람권 정치체제로의 편입이라는 사회의 전 분야에 걸친 근본적인 변모에 따라 이 시기의 예술은 카파도키아 지방 전통, 튀르크 문화, 비잔티움을 계승한 니케아 제국의 영향이 복합된 일종의 문화 접변 현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탄생한 카파도키아의 미술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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