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가사, 세계적으로 희소한 전근대 여성 문학…안방 속 조선시대 여성들의 생생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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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가사, 세계적으로 희소한 전근대 여성 문학…안방 속 조선시대 여성들의 생생한 일상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2.16 2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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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글 쓰는 여자들: 규방가사로 들여다본 전근대 여성들의 삶과 생각 | 서주연·정기선 지음 | 사우 | 240쪽

 

이 책은 규방가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 쓴 교양서이다. 규방가사(혹은 내방가사)는 조선 후기 여성들이 쓴 한글 문학을 말한다.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없고, 글을 배워도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당시 여성의 역할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쌈과 바느질 같은 집안일에 힘쓰고 시부모를 봉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허랑하게 글을 지어 퍼트려서는 아니 되니”라는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읽고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과 생각을 4음보 운율에 담긴 가사에 담담하게 풀어냈다. 가사를 지어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사연을 풀어내기도 하고, 마음 아픈 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규방가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생하고 솔직했다. 여성들은 공감하는 가사를 베껴 쓰거나 고쳐 쓰면서 널리 퍼뜨렸다. 꾸밈없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성찰한 규방가사 덕분에 우리는 전근대 시기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의 기쁨과 슬픔, 꿈과 좌절은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저자들은 분야별로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의미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이 책에서는 규방가사를 네 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 ‘귀한 딸을 위한 노래’는 조선시대에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규방가사는 주로 여성들이 창작하고 향유했지만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해 아버지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작품도 있다. 

2부 ‘세상 밖으로’는 개화기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여성이라 불리는 여성들은 신문과 집지를 통해 ‘여성해방’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규방가사에서도 남녀평등과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이 담기게 되었다.

〈해방가〉는 여성이 구질서, 구도덕에서 깨어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뿐만 아니라 구여성이 쓰는 규방가사에도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기게 된 것이다.

3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남자와 다르지 않다’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을 하는 남편이나 아버지를 따라 망명길에 오른 여성들이 쓴 가사를 소개한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져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지자 많은 이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 상해 등지로 이주하여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여성들은 넓은 집과 하인들을 두고 떠나 낯설고 열악한 환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면서 견뎌야 했던 시간을 가사에 세세하게 기록했다.

처음에는 ‘여필종부’라는 명분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독립운동 현장에서 운명을 함께하면서 이들의 의식은 점차 변해간다. 처음에 보여준 소극적인 지지와 달리 세상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면서 굳은 결의에 찬 강인한 여성으로 변화한다. 이들이 남긴 가사가 있어서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운동 속 여성들의 노고가 알려졌다. 총칼을 들고 직접 나섰던 여성들은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뒷바라지하며 조력했던 여성들의 희생은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4부 ‘우리들의 연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친정 나들이 한번 하기도 힘들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혼인이 필수였다. 아버지, 남편, 아들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었으니 여성에게 결혼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여성들은 시집살이의 고단함과 단절감을 규방가사를 쓰고 읽으면서 달랬다.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며 시집살이를 견뎌야 하는 심정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아픔이었다. 여성들은 무수한 불행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와 남의 고통을 저울질하지 않고,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하고 회복을 돕는다. 규방가사가 단순히 감정의 공유가 아니라 위로와 연대의 문학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규방가사는 “이내말삼 드러보소”라며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홀로 읊조리는 독백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말하기였던 것이다. 여성은 중문 ‘안’에 갇힌 존재였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된 존재는 아니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외출 한 번 하기도 힘든 삶이었지만 규방가사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했다. 그들은 억울한 삶을 글로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랑을 적어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함께하고 나서 여성들 간의 유대와 연대를 소중히 기록했다. 또한 여성을 위한 교육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여성들은 규방가사를 읽고 지으면서 지식과 교양을 터득하고 전수했다. 규방가사는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 위로받고 공감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해간 여성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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