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주장을 반박한 1979년 12월 12일 김대중의 인터뷰 음성자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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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주장을 반박한 1979년 12월 12일 김대중의 인터뷰 음성자료 공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1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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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양재진)은 1979년 12월 12일 김대중이 《뉴스위크》 동경지국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 음성자료를 공개했다.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김대중에 대한 가택연금도 해제됐다. 김대중은 여전히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전보다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도 그러한 배경에서 이뤄졌다.

이 인터뷰에는 1979년 10.26사태 이후 민주화 이행 및 정국 현안에 대한 김대중의 주장이 담겨 있다. 전체 분량 18분 22초 중, 이번에 공개하는 것은 1979년 11월 말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 강조한 ‘용공(容共) 혐의가 있는 김대중에 대한 반대’에 대해 김대중의 반박 내용이 담긴 4분 17초 분량의 음성자료이다. 김대중은 크리셔 기자에게 자신이 용공 혐의를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려 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979년 11월 말 언론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의견을 청취했다.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발언은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이 내용은 ‘정보보고서’ 형태로 외신들과 국내 정치인들에게는 알려졌다.

이후 정승화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79년 11월 말 언론계 간담회에서 김대중에 대한 발언에 대해 군의 주요 인사들이 동조했다고 밝히며,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보면 용공혐의가 있고 전향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려된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의 발언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고 김대중 등이 반격을 해올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겠다고 보고한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온건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의식하고 있던 정승화조차도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김대중을 용공분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에는 김대중과 민주세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의한 편견이 매우 심했다. 

크리셔-김대중 인터뷰에서 거론된 정승화의 발언은 당시 군부와 김대중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며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사실상 군권을 차지한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명분인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과격 용공 세력들의 내란음모에 대한 대응’의 배경과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최근 1979년 12.12 군사반란를 주제로 한 영화 ‘서울의 봄’과 같이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사료는 1979년 10.26과 12.12 그리고 1980년 5.17과 5.18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김대중-크리셔 인터뷰 녹취문】

* 버나드 크리셔
- What about general Jeong's statement two weeks ago that this paper published? How do you respond to that?
이 정보보고서가 나가기 2주 전에 발표한 정 장군의 발언은 어떻습니까? 그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십니까?

* 김대중
- Any how I can tell you those things which was set by Jeong are totally untrue.
어쨌든 정 장군이 말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 I have many many evidence and witnesses and that things are not new.
저는 많은 증거와 증인을 가지고 있고 상황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There was a some political rival in Mokpo my electoral national assembly district.
목포에 어떤 정치적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 버나드 크리셔 
- When are you talking about? what period of time? 1950?
언제 이야기를 하시는건가요? 1950년?

* 김대중 
- Anyhow before the Korean War there was some political rival he many times made a secret report to the investigating authority insulting me has communistic background.
어쨌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고향 목포에 있었을 때 정치적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공산주의 배경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저에 대한 모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당국에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 But Seungman Lee's goverment after military coup, military government investigate me many times and then finally I was approved I was approved purity, not guilty and I have good evidence that when you go back to Japan, you may find out my book I wrote it in Japanese. 
하지만 이승만 정권과 군사쿠데타 이후의 군사정권에서 여러 차례 저를 조사했지만 저에 대한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일본에 돌아가시면 제가 일본어로 쓴 책에 이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There, I explained my past career after world war 2, how fast I participate in national founding committee which were participated by both right wing and left wing.
그 책에서 저는 우익과 좌익이 모두 참여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얼마나 빨리 참여했는지를 설명하면서 해방 이후(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저의 과거 경력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 I was liberated from Japanese at 21 year old so I participated there.
저는 해방이 될 때 21살이었고 건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I helped my senior leaders working and I immediately found communist is not good for us.
저는 선배들이 일하는 것을 도왔고 공산주의가 우리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 I found many things. There are many things.
공산주의의 좋지 않은 수 많은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았어요. 

* 버나드 크리셔
- What do you think the role of the military should be in Korea?
현 정국에서 한국 군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김대중
- Military. It is very clear military should be neutral.
군이요, 군은 반드시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버나드 크리셔
- It should be neutral but, aren't you afraid that they already gave a clue that they will not support you?
물론 군은 중립적이야하는데요, 다만 그들이 이미 당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를 준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 김대중
- I think if our people support me, military will follow the will of our people. I believe so.
저는 우리 국민들이 저를 지지해 준다면 군은 우리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버나드 크리셔
- But didn't general Jeong already indicate that they couldn't take your orders or that doesn't concern yet?
하지만 정 장군은 이미 당신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거나 혹은 이러한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 김대중
- I think general Jeong's remark I believe came mainly from wrong information.
제가 믿기로는 정 장군의 발언은 잘못된 정보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 So if he knew real information, real fact, then he would have no reason to suspect me. Anyhow I don't want to any direct comment on his remark because it was not open disclosure.
그래서 만약 그가 진짜 정보, 진짜 사실을 안다면, 그는 저를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의 말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버나드 크리셔
- But he said three times to ...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 김대중
- Yeah I know I know. So as I told you, if you want, if anybody want to hear about the detail things. I am ready to explain all things.
네, 저도 알아요. 제가 말씀드렸듯이, 당신이 원한다면, 누군가가 구체적인 것에 대해 듣고 싶다면, 저는 모든 것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발언 내용 및 배경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979년 11월 26일 언론사 사장, 11월 27일 언론사 편집국장, 11월 30일 국방부 출입기자 등을 상대로 간담회를 갖고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의견을 청취했다.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발언은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간담회 내용에 대해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내용은 ‘정보보고서’ 형태로 언론계 내부, 정관계 등 주요 인사들에게 알려졌으며 외신들도 해당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정승화의 위상을 고려할 때 그의 발언은 매우 무게 있게 받아들여졌으며, 1979년 12월 11일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김대중의 인터뷰 기사에도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승화는 1987년 자신의 회고록인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1987)에서 이때의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자세하게 밝혔다.(정승화회고록 136쪽에서 141쪽까지). 당시 언론에는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정승화가 스스로 이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당시 정승화가 강조한 내용은 3가지이다.

1) 10.26 이후 국내 치안 및 안보와 관련해서 국내 일부 과격 세력들의 무리한 행동이 사회안전을 흔들 수 있고 용공분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반국가적인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한다.
2) 개헌을 통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때 용공혐의가 있는 사람이 군통수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3)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보면 용공혐의가 있고 전향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기때문에 우려된다. 

정승화는 정보기관에서 생산한 김대중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다고 밝혔다(정승화회고록 136쪽). 이 자료는 해방 이후 김대중의 활동 중에서 용공혐의가 있는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정승화회고록 136쪽과 137쪽). 이 내용은 김대중이 위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로 청년 시절 목포에서 활동할 당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의 무고였다. 그런데 이 내용이 공안기관의 존안자료로 남아 있다가 김대중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자 김대중에 대한 용공혐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김대중은 크리셔 기자에게 자신이 용공혐의를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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