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재 고구려사 연구 기반 확충을 위한 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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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재 고구려사 연구 기반 확충을 위한 학술회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12.1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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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현재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유물과 유적은 한국학자의 접근이나 직접 조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 동북지역의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한 조사는 20세기 전반에는 일본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학자가 주도했다. 1992년 한중 수교로 한국학자에게도 접근의 길이 열렸지만,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래 한국학자의 직접 조사는 통제됐다.

이에 따라 한국학자는 기존 일본학자나 중국학자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각종 조사보고서나 연구논저가 여러 간행물에 산재하거나 절판된 경우가 많아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15년간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집대성하는 DB 구축사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올해 총서를 완간했다.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 집대성 사업은 1단계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DB 구축용 기초자료 정리를 진행했다. 2007년과 2008년 고구려의 발상지 압록강 중상류를 시작으로, 2009년부터 2011년에 국내성 통구분지, 2012년부터 2014년 요동반도와 요하, 송화강, 두만강 유역 등의 유적과 유물을 정리했다. 또한, 2015년과 2016년에는 첫 조사 이후 새롭게 조사된 유적 정리 작업을 했다.

DB구축사업 추진 결과 고분군 246곳과 개별 고분 269기, 성곽 301곳, 성곽의 개별 유구 31기, 기타 유적 40곳, 개별 유물 84개 등 총 971건의 유적, 유물을 정리했다.

이어, 2단계로 기존의 DB 구축용 기초자료를 재정리해 총서를 발간함으로써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각 유적의 전체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은 12월 8일(금) 오후 2시 재단 11층 대회의실에서 중국 소재 고구려사 유물에 대한 연구 기반 확충을 위한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역사적 성격’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총 5개 주제가 발표됐다. 20세기 초 이래 지난 100여 년간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의 조사현황을 총괄 검토하는 한편, 고구려 고분과 성곽의 공간적 분포현황, 시간적 전개양상, 역사적 성격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의 조사현황과 활용방안’을 발표했다. 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 21세기 초엽 등 세 시기로 나누어 시기별 조사 주체와 주요 성과를 검토했다. 20세기 전반에는 일본학계,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학계가 조사를 주도한 반면, 우리 학계는 유적에 대한 접근조차 자유롭지 못함을 밝혔다. 

이에 고구려사 연구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현황을 꾸준히 조사해 왔다고 밝혔다. 향후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한편, 디지털과 AI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가상 전시와 체험 시설을 갖춘 고구려 전문 박물관을 건립할 필요가 있음을 제기했다.

▷ 김종은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은 ‘고구려 초기 적석묘 분포지역의 정치집단 형성과정 탐색’을 발표했다.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 말 ~ 2세기에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조영되기 시작한 고구려의 독특한 무덤이다. 

이에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 분포하는 적석묘의 시공간적 분포양상을 분석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구려’인들이 정치집단으로 성장하며 통합·복속되는 과정을 다각도로 고찰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초기 적석묘가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권역별로 차이를 보이는 양상을 새롭게 파악하는 한편, 고구려 건국을 주도한 5나부 지역을 구체적으로 비정했다.

▷ 강현숙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중국 소재 고구려 고분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를 발표했다. 고구려 고분은 여러 차례 변화했다. 초창기에는 적석묘만 조영했지만, 3-4세기에 횡혈식 매장방식과 봉토분구가 도입되면서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병존하다가 6세기를 전후해 봉토석실분으로 통일됐다. 

이러한 고분의 변천은 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구려의 국가 형성과 성장, 태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체제 확립, 문화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특히 4-5세기 초대형 적석묘는 ‘왕 중의 왕’이라는 태왕의 위상을 잘 보여주며, 종족적 정체성이 강한 적석총의 보수성은 6세기의 기단봉토분으로 유지됐다.

▷ 정동민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압록강 중상류 유역 고구려 성곽의 공간적 분포’를 발표했다. 먼저 고구려 발상지로 첫 번째 도성인 졸본과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이 자리한 압록강 중상류 일대 성곽의 전체적인 공간 분포양상을 살펴봤다. 

이를 통해 고구려 성곽이 집안분지로 향하는 노령산맥 일대의 모든 교통로를 봉쇄하는 형태로 분포한 사실을 밝히고, 이는 국내 도성의 방어체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규명했다. 또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한 성곽은 평양천도 이후 압록강 중상류 일대가 하나의 권역으로 변모하면서 지방통치를 위한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했다.

▷ 백종오 한국교통대 교양학부 교수는 ‘고구려 성곽의 편년 설정을 위한 예비적 검토: 한국 고대 축성사의 비교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고구려 성곽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중국 소재 고구려 성곽과 남한지역 삼국시대 성곽의 축성술을 비교 검토했다. 이를 통해 중국 소재 고구려 성곽은 5세기부터 포곡식 석축산성이 널리 축조된 반면, 남한지역의 성곽은 5-6세기에도 대부분 토축성임을 파악했다. 

특히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까지도 포곡식 토축산성과 함께 테뫼식의 소형 석축성만 축조했다. 이로 보아 고구려의 축성술은 국가발전단계 특히 중앙집권체제와 지방제도 정비와 밀접히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창기 방어시설인 고험처(高險處)의 축성설책(築城設柵), 토축성, 석축성 단계로 변화 발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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